제3장 마지막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제3장에 대한 리뷰 및 설명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6. 개성의 계발의 필요성과 독창성
①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개성을 계발하고 육성하는 인간은 누가 보아도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됨. 개개인의 삶이 풍성해지면, 그 개인들로 이루어진 슬롯 역시 풍성해짐.
➜ 『자유론』을 읽을 때, 이 부분, 즉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개성을 계발하고 육성하는,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라는 표현에 이를 때마다, 제 머릿속에서는 이것이야말로 ‘개인’에 대한 가장 올바른 ‘질(質)적’ 정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우리는 ‘개인’이라는 말을 중시 여기고, 또한 ‘개인의 권리’를 헌법적이고 본질적인 가치로 당연시하지만, 정작 우리가 ‘개인’이라는 말을 쓰는 맥락을 보면, 그 의미가 ‘양(量)적’인 것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매우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전체에 대비되는 개인이라는 이분법적인 좁은 이해, 혹은 1+1=2라는 식의 집합적, 환산적인 의미에서만 이 말을 쓸 뿐, 그 이상의 반성으로까지는 좀체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아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 말을 할 때도 그 개인들은 대개 반드시 어떤 (이익) 집단 내에 소속되어 있다는 승인이 전제될 때, 의미 있는 고려의 대상으로 여겨지고는 하지요. 그 결과, 밀이 여기서 강조하는 ‘개인’의 진정한 의미를 정의 내리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 즉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라는 가장 본질적인 단서가 ‘개인의 권리’라는 이름과 ‘집단의 힘’으로 오히려 부정되게 되는 결과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또 이와는 반대되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지요. 이런 걸 보면 세상은 정말 아이러니한 것 같습니다. 즉, 개인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집단이 와해된다고 할까요? 요즘 사람들이 종종 반쯤은 진담, 반쯤은 농담으로 하는 말 중에 제가 싫어하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바로,
“나만 잘 되게 해주세요. 나만.”
이라는 말이지요. 『데미안』을 보면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단체란 아름다운 것이야. 그러나 지금 우리 눈앞 여기저기에서 번성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은 전혀 단체가 아니야. 단체란, ‘개인’들이 서로를 알기 시작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지. 하지만 지금의 단체들은 그저 ‘군중의 결속’에 불과해.”
저는 요즘의 단체들과 개인들을 보면, 데미안의 이 씁쓸한 말이 자꾸 떠오릅니다.
② 독창성의 기여: 인류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게 하는 독창적인 선구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며, 세상의 “소금”과 같은 존재임. 천재성은 오직 자유의 대기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 쉴 수 있음. 왜냐하면 천재라는 말속에는 이미 그들이 다른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개성이 강하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임.
➜ 밀의 이 말을 지정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한번 반성해봅시다. 그러면 이내 곧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인류 경험적으로 깨닫게 되지요.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예로 들어볼까요? 실리콘밸리라고 하면 보통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사실이지요. 오늘날의 4차 지식혁명은 바로 이곳을 통해 시작되고, 이곳으로 귀결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를 돌이켜보면 언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닙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면, 2차 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를 개발한 천재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냉전 당시 정치적으로 핍박을 받을 때, 그를 조사하던 수사관들이 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왜 전범국이자 적국인 독일에서 유학을 했었느냐?’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이에 대해 오펜하이머는 이렇게 대답을 하지요. ‘그 당시에는 독일이 물리학에서 가장 최첨단에 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미국이 오늘날의 독점적인 과학 기술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독일이 나치에 의해 독재되고, 전체주의 국가가 되기 시작하면서, 당시 독일에서 활동하던 천재들 중 상당수가 미국으로 망명을 했기 때문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이 바로 밀이 말한 대로, ‘자유의 공기’는 천재라는 세상에서 가장 이해받기 힘든 개성적인 존재들이 그 가능성을 꽃피우고, 이 꽃이 세상을 위한 ‘소금’이 될 수 있기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자유가 천재들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가들은 많지만, 그 모든 나라들에서 천재들이 균일하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유럽의 역사를 보아도 ‘천재의 출현’은 어떤 한 시기에 두드러지게 몰려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크게 보면 르네상스에서 근대 초기에 이르는 기간이 그러하지요. 아프리카에도 분명 아인슈타인 같은 인간은 태어날 겁니다. 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그런 존재인지도 모른 채로 살다 죽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개성에 대한 슬롯적인 필요성에의 요구, 즉 공리주의적 효용에 대한 요구가 없기 때문일 겁니다. 즉, 쉽게 말해서 천재의 창의성에 대한 수요가 없기 때문에 공급도 현상화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수요는 곧 “자유의 대기”와 함께 물질적인 여유가 전제되어야만 자연스럽게 발생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7. 대중과 개인
① 이 시대의 온 세계의 걸친 일반적인 경향은 ‘평범한 사람들’이 인류 가운데서 떠오르는 권력이 되고 있음.
② 오늘날의 대중(“평범한 사람들의 집합체”)의 부각은 개인의 소멸로 귀결되고 있음.
③ 이 시대에 권력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대중’의 권력임.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정부는 평범한 정부가 될 수밖에 없음.
④ 대중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인간상은 탁월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 아닌, “뚜렷한 개성이 없는 인간”임.
⑤ 진정으로 지혜롭거나 고귀한 모든 일은 개인에게서 시작되고, 또 그래야 하는 당위가 있음. 평범한 사람들이 명예와 영광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그 개인이 선구적으로 걸어간 길을 따라가는 것임.
➜이 말들은 『자유론』에 기재된 밀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온 것입니다. 오늘날의 헤게모니는 정말로 ‘대중슬롯’이지요. 예를 들어, 밀 당시와는 달리 이제는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핏줄이나 가문에 의한 계급도 고급 소비를 위한 광고나 한 나라의 브랜딩을 위한 도구일 뿐, 실질적으로는 유명무실한 것이 되어버렸으니까요. 또한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주의’를 ‘대중 민주주의’와 동일시 여기는 것을 당연한 상식처럼 여기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밀의 이 말에 대해 반감을 가지시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굉장히 쟁점적일 수 있는 의견이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 글은 좋은 바카라을 소개하는 것에 그 1차적인 목적이 있기에 이처럼 너무 쟁점적일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더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각자 나름의 의견을 가지고 생각해주세요.
제가 여기서 부연 설명을 드릴 수 있는 건, 다음과 같은 정도입니다. ‘대중슬롯’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철학자들은 단지 밀 한 명뿐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 말입니다. 예를 들어, 왜곡된 민주정의 폭정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라는 스승을 잃은 플라톤이 그러했고, 『예술의 비인간화』, 『돈키호테 성찰』, 『대중의 반란』 등의 유명한 저서들을 쓴 스페인의 철학자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José Ortega y Gasset 역시 그러했으며, 요즘 처세술을 목적으로 사람들이 종종 그가 쓴 글귀들을 편집해서 마치 경구처럼 언급하는, 초인론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러하지요.
하지만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을 통해, 인간 위의 존재(Das Sein über dem Menschen)는 신이 아닌, 바로 인간 자신, 즉, ‘초인(超人, der Übermensch)’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 근저에는 대중에 대한 멸시가 어느 정도는 깔려 있었습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보면, 차라투스트라로 상징되는 초인은 이 대중들을 ‘난쟁이들’이라는 표현으로 지칭하고 있지요. 니체의 철학이 여전히 주변적인 까닭은 바로 이런 극단성에 기인합니다. 왜냐하면 니체의 의도야 어쨌든지 간에 왜곡되어 이해될 여지가 매우 크거든요.
개인적으로 니체의 이 극단적 이념과 다윈의 진화론의 왜곡된 조합이 낳은 결과가 곧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인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탈린은 본래 매우 독실한 신학교 학생이었지만, 다윈의 진화론이 그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하지요. 광신적인 인간일수록 궁극적으로는 자기회귀적인 경향성이 강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이런 경향성을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나 『악령』의 키릴로프를 통해 구체화시켰지요.
이런 이념이나 이론들은 그 자체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지구상의 다양한 의견들 중 고찰의 가치가 충분히 높은 의견들에 속하는 지성의 결과물들이지요. 문제는 바로 이것을 자기 멋대로 읽고, 또한 이 자의적인 이해를 멋대로 ‘사실’로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이런 의견들은 사람들의 어떤 본능을 매우 자극하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그것은 바로 ‘자기 숭배’에의 본능, 즉 권력욕과 처벌 욕구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니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말 중에 ‘권력에의 의지가 곧 생의 의지’라는 말에는 공감을 합니다. 그리고 이 공감은 제 의도와는 반대로 지금까지 세상을 관찰해 온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매우 실제적인 공감이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이 죽음을 피하고 생존하고자 하는 게 ‘왜’라는 물음이 쉽게 개입될 수 없는 본능인 것처럼, 권력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태도 역시 이 생존 본능만큼이나 맹목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니체는 이 권력에의 의지를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지요. 즉, 다시 말해 개나 소나 다 가지려고 하니까 세상이 이 모양이다 라는 식인 겁니다. 실제로 니체는 민주주의를 ‘중우(衆愚) 정치’, 즉 ‘어리석은 대중들에 의한 정치’라고 비난했습니다. 권력에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은 오직 초인에게만 주어져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바로 여기서 ‘‘초인’은 과연 어떤 존재이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겠지요. 그리고 아마도 이 지점이 니체 철학의 윤리, 즉 도덕론의 내용일 겁니다. 즉, 매우,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그의 철학이 왜곡되지 않을 터이지만, 사람들은 보통 이 지점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보통 관심이 있는 건, 이 문제가 제기되기 전까지의 내용까지 만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분만이 그들에게 어떤 쾌락을 주거든요.
사실, ‘der Übermensch’라는 말은 ‘천재’를 뜻하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초인보다는 이 뜻에 더 가깝지요. 그리고 니체가 이 말을 ‘초인’으로 재정의를 내릴 때, 이 ‘천재성’은 그 초인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질적인 특성입니다.
밀은 니체처럼 대중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지만, 결코 니체와 같이 극단적인 혹은 극단적으로 오해될 소지가 큰 생각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 밀은 천재성을 지닌 강력한 인물이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니체의 초인설과 같은 ‘영웅숭배사상’을 지지했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유론』에서 슬롯 전체의 영구적인 공리적 효용을 위해 밀이 요구하는 것은 “천재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느 길로 가야 할지를 보여줄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일 뿐입니다.
그 근거로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의 여론이 지배적인 권력이 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그러한 경향을 견제하여, 그 속에 내재된 해악을 균형적으로 고쳐 나갈 수 있는 탁월한 지성과 훌륭한 사상을 지닌 개인, 즉 천재가 그 개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라고 말입니다.
이런 천재 중의 하나가 바로 소크라테스일 겁니다. 당시 그리스 아테네는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대중이 포퓰리즘과 입만 산 궤변론자들에 의해 작위 되고 호도되는 여론의 옷을 입고 무분별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요. 즉, 말하자면 합법을 가장한 위법과 무법이 판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희생된 천재 소크라테스는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독약을 마시지요.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 말입니다. 즉, 그가 생전에 그렇게 강조하던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죽는 순간까지 몸소 보여주고 죽은 것입니다.
8. 개인의 취향의 다양성
① 사람들의 취향이 다양하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모든 사람을 하나의 틀에 맞추려 해서는 안 되는 충분한 이유가 됨.
일부 수도원과 같은 매우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간슬롯에서 취향의 다양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이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한다든지, ‘모두가 하는 일’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마치 중대한 도덕적 의무를 위반한 것과 같은 혹독한 대우를 받음.
오늘날 대중의 여론의 특징 중 하나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지성뿐만 아니라 취향에 있어서도 무난하다는 것임. 그 결과, 독특한 취향을 가진 개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정신이 아니거나, 자제력이 부족한 사람으로 업신여기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음.
9. 자유의 정신의 필요성
① 관습의 독재: 슬롯 속에서 관습보다 나은, 다른 어떤 것을 적대함으로써 인간의 발전을 저해함.
② 개혁의 정신과 자유의 정신의 차이:
a. 개혁의 정신 – 개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개혁을 이루고자 하는 성향.
b. 자유의 정신 –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부분적으로나 일시적으로 손을 잡을 수 있는 성향.
10. 다양성의 감소
① 동질화의 요인들:
a. 교육의 기회 확대, 교통과 통신의 발달, 상업과 제조업의 발달로 인한 슬롯적 인프라의 증가 -> 모든 사람들이 야심을 품고 경쟁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됨. 그 결과, 출세는 더 이상,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계층의 목표가 되고, 이 역시 슬롯적 동질화를 더욱 촉진시키는 주된 요인이 됨.
b. a의 예들보다 더욱 강력한 요인: 여론이 국가를 지배하는 힘으로 완벽히 자리 잡았다는 사실.
➜ 8, 9, 10번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자유론』 3장의 내용에 대한 정리가 다 끝났습니다. 앞으로 두 개의 장이 더 남았습니다만, 4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다음 시간에는 잠시 쉬어갈 겸, 세 번째 인터미션을 가지도록 할게요. 미리 예고드리면, 프란츠 카프카의 미완성 유고작인 장편소설 『성(城)』에 관해 소소하게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