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자유론』리뷰 시리즈 (13)

제3장 두 번째

byJuncus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주에 이어서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 제3장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해보겠습니다.


3. 능력을 발전시키는 조건


⇨ 여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공리주의적인 맥락에서 보았을 때, ‘최대의 효용’을 낳을 수 있는 매우 유효하고 실현 가능한 잠재력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 밀에 따르면, 이 잠재력은 반드시 개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유능하고 부지런한 개미들이 많을수록 거대하고 유기적인 개미 슬롯를 이루듯이, 개개인의 잠재력은 궁극적으로 슬롯 전체의 효용을 낳게 된다는 게 밀의 일관된 믿음이니까요,

(1) 훔볼트(Wilhelm Von Humboldt)


① “개개인이 쉬지 않고 자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목표는 각자의 개성에 맞춰 능력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② ①을 위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두 조건: “자유” 와 “환경의 다양성”


③ ②의 두 조건이 결합될 때 “개개인의 활력” 과 “갖가지 다양성” 이 생겨나고 이 두 개가 합쳐져서 “독창성”을 이루게 됨.



➜ 이 내용에 대해 딱히 설명드릴 만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쉽게 이해하시고 납득하실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훔볼트에 대해서는 모르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으니, 이것만 짤막하게 설명하고 지나갈게요.


훔볼트는 프로이센의 유명한 형제입니다. 그중에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훔볼트는 빌헬름 폰 훔볼트로, 형을 의미합니다. 동생인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지질학자로 유명합니다.


빌헬름 훔볼트는 말하자면, 전인(全人)적인 지식인의 전형으로, 철학자이기도 하고, 정치가이기도 하며, 베를린대학교를 세운 교육자이자 동시에 매우 유능한 언어학자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언어학도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인물일 겁니다. 대학원 때 방학 동안 언어철학 관련 세미나를 아주 빡세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훔볼트를 한참 읽어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 소국들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 제국이 된 것은 프로이센이라는 강력한 패권국의 등장 때문이지요. 프로이센은 군국주의 국가이기도 했지만, 계몽주의의 선봉에 있던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교육을 국가 역량의 초석으로 보고 많은 신경을 썼었는데,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인물 중 하나가 바로 훔볼트일 겁니다.


①번에 인용된 말에서 드러나는 훔볼트의 교육관은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발전시키는 것을 그 개인에게 부여된 일종의 소명처럼 보고 있다는 점 같습니다. 즉, 개인이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개인의 이 행위를 존중하고 독려하는 문화를 조성하는 것을 일종의 ‘당위’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베를린대학교 훔볼트 석상>


(2) 교육을 통해 알게 된 인류의 경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들을 성숙하게 발전시킬 수 있는 사람들의 특권이자 인간답게 살아가는 필수조건임.

➜ ‘교육을 통해 알게 된 인류의 경험을 자기 방식으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 제가 보기에는 이것이 바로 교육의 주된 목적이자 핵심 중 하나입니다. 즉, 단순한 지식의 암기와 답습이 아니라, 배운 것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창의성을 기르는 것, 그것이 교육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일 겁니다.


AI가 슬롯와 산업 그리고 문화에 이르기까지 이미 기준이 되었거나, 되어가고 있는 지금, 단지 말 잘 듣는 일꾼들의 양산을 위한 교육의 시대는 이제 정말로 끝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꾼들은 이제는 정말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존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교육의 가장 원시적인 목적이 ‘생존’이라면, 이제는 이 생존을 위한 교육조차 방식을 완전히 달리해야 할 시대가 된 것이지요. 이는 위기일 수도 있고, 거꾸로 굉장한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상황이 밀이 표현한 바대로, “진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영속적인 이해관계에 토대를 둔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효용”으로 이어질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초심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져보는 것이지요.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그리고 밀의 『자유론』은 이에 대한 매우 진지하고 실제적이며 항구적인 하나의 길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3) 주의할 것들


첫째, 사람들의 경험이 지나치게 좁을 수 있고, 사람들이 자신들이 한 경험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수도 있음.


둘째, 그 해석이 옳을지라도, 경험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적절하지 못한 경험일 수도 있음. 왜냐하면 어떤 사람의 환경이나 개성이 관습이 전제한 환경이나 개성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임.


셋째, 특정한 관습이 옳은 것이고, 또 어떤 사람에게 적절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단지 관습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따라야만 한다면, 인간에게 주어진 독특한 능력과 자질들의 교육이나 발전이 그 사람에게서는 이루어질 수 없음. 인지, 판단, 감정, 정신 활동, 도덕적 선호 등은 오직 선택을 행할 때만 훈련이 될 수 있음. 하지만 관습을 따른다는 것은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뿐임.


➜ 이 내용과 관련해서 제 생각을 좀 써보겠습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아주 강하게 확신하고 있는 인간 슬롯의 진실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신념은 사실을 능가한다.’

이 말을 딱 들으면, 좋은 말처럼 들리시겠지만, 저는 전혀 그런 뜻으로 말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건 바로 ‘신념의 위험성’입니다.


신념은 슬롯적 동물인 인간이 만들어낸 실체를 초월한 태도인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양날의 검과 같은 것이지요. ‘좋은 신념’은 자율성의 양분이 되지만, ‘나쁜 신념’은 그것을 죽이는 매우 강력한 독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쁜 신념’은 대게 집단적이지요. 즉 같은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끼리 모여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면서 점차 ‘다름’을 튕겨 내어 버립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가 되는 것, 이런 방식이 궁극적으로 그들이 처음 믿었던 신념의 대상조차도 부정해버린다는 점입니다. 즉, 어느 순간부터 자기 자신들이 그 신념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즉 ‘자기를 우상화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자기 우상화’는 여러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광적인 민족주의나, 과도한 피해의식, 선한 약자라는 자학적이면서도 가학적인 자의식, 그리고 선민의식 등등 말입니다. 이런 의식을 공유한 집단의 공통점은 ‘답이 정해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즉, 개인의 선택의 자유 따위는 완전히 무시됩니다. 설사 존중해준다고 할지라도 그저 그런 척하는 요식 행위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왜곡된 신념이 강해질수록 ‘사실’ 역시 왜곡됩니다. 이건 필연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사실’이란, 인식론적으로 문제적인 것이니까요.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게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라는 20세기 초 다이쇼 시대에 활동했다가 요절한 천재적인 소설가가 있습니다. 주로 『라쇼몽(羅生門)』 이나 『갓파』, 『덤불 속(藪の中)』 과 같은 단편들을 썼는데, 이 중 『덤불 속』은 다중 화자를 매우 절묘하게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작품입니다. 내용은 이겁니다. ‘덤불’ 속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와 관련한 목격자, 관련자들의 진술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실들’의 중첩을 그대로 드러내는 게 이 작품의 주제입니다. 즉 이 이면에 있는 인간의 심리라는 가장 사실에 가까운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 주제인 것이지요.


이 소설을 읽으면 ‘뭐가 사실이지?’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히려 뭐가 사실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만 알게 될 뿐이지요. 그리고 나아가 다음과 같은 것도 어렴풋이 감지하게 됩니다. 인간은 ‘사실’을 그 자체로 아는 것보다는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에 더 골몰한다는 점 말입니다. 즉, 우리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거짓의 자기장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의식적일 수도 있고, 무의식적일 수도 있습니다. 보통은 무의식적이겠지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개인들의 수만큼이나 많기 마련인 이 ‘사실들’을 가능한 한 온전히 경험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중에서 스스로가 가장 옳다고, 혹은 가장 설득적이라고, 또는 가장 효용이 크다고 여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진실’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것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는 것과, 이런 자율성을 스스로 키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할 수 있는 지성과 용기는 자율의 필수조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계(自戒), 즉 스스로를 부단히 경계하는 것의 가치에 대한 신념이야말로 자유의 진짜 얼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계몽주의가 심어 놓은 가장 큰 착각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관한 오만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것은 전체주의 같고, 그렇기에 이 태도는 매우 막강합니다. 자유주의는 인간 본성의 작은 밀알 같은 가능성에 가깝고, 그렇기에 그것에 베팅하는 것은 매우 낮은 확률에 희망을 거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무엇보다 슬픈 건, 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목적적인 것이 되어야 함에도 대개는 전체주의적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는 점입니다. 즉, 자유주의의 옷을 가장(假裝)한 전체주의랄까요? 그리고 이러한 전체주의는 아마도 분명 가장 강력한 전체주의일 겁니다.


이런 태도의 바카라략은 분명합니다. 즉, 여러 모순되는 정보들을 반복적으로 흘려서 사람들을 혼동시킵니다. 그런데 혼동을 피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요. 하지만 이게 곧 함정으로 이어집니다. 즉, 혼동 속에서 피로해진 사람들에게 어떤 작위적인 내러티브를 주입시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성공하면, 그것이 마치 강력한 해결바카라처럼, 심지어는 ‘진실’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게다가 이는 일견 사람들의 ‘동의’를 기반으로 한 것처럼 보이기에 그 자체로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결국 사람들은 큰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스스로가 매우 ‘자유로워졌다’고 믿어버립니다. 즉, 그 착각을 믿음의 성으로 만들어서 사람들 스스로가 그 성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일견 매우 벤담적인 효율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은 분명 감옥이지만, 사람들이 이 감옥 안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아는 것보다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이 불러오는 작위적인 사실에 안락감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런 개인이 많다면, 이 역시 효용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좀 헷갈립니다. 하지만 이럴 때 아마 밀은 이 말을 우리에게 해주지 않을까요?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낫다.”


라고 말입니다.


이번 주는 이 정도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는 제 개인 사정으로 인해 한 주 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전 2주 후에 다시 『자유론』 리뷰를 들고 오도록 할게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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