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리뷰 시리즈 (12)

제3장 첫 번째

byJuncus

벌써 한 주가 흘러갔네요.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부터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 대한 리뷰를 다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장 지난했던 2장은 지지난주에 끝이 났지요. 이번 주부터는 새로운 장을 시작하겠습니다. 내용도 2장보다는 쉬울 겁니다. 3장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해할 만한 것들이니까요. 그럼 바로 시작하도록 할게요


제3장 개성(individuality): 인류의 복리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

1. 이번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논제

‘인간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스스로 감수하는 한, 다른 사람들에 의한 물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방해 없이, 자신의 의견에 따라 행동하는 데 자유로워야 하는가?’


⇨ 앞으로 제3장의 내용은 이 논제에 대해 고찰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단, 오늘날의 시각에서 이 물음은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이 매우 상식적이고 당연한 질문인 듯이 보이지요. 즉, 굳이 답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막상 슬롯가 돌아가는 실상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물음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슬롯는 상당히 비상식적으로 돌아가는 경향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강하니까요. 그렇기에 이러한 물음은 언제나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일종의 ‘브레이크’ 같은 겁니다. 브레이크가 없는 슬롯는 폭주하는 고장 난 기계와 같으니까요.


밀은 이 논제를 다음과 같이 매우 실제적인 맥락에서 고찰합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그 당시 슬롯가 오늘날과 매우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① 어떤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해로운 행위를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행위가 되는 경우에는, 그러한 의견을 표현한 행위에 대해서 바카라임이 면제되지 않는다.


➜ 밀의 이 단언을 저 논제에 대한 여러 가능한 대답들 중 하나로 생각을 해봅시다. 그렇다면 알 수 있는 건 무엇일까요? 일견 알 수 있는 건, 이는 저 질문에 대한 부정적인 답변 중 하나라는 것일 겁니다. 즉, 아무리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스스로 감수’할 의사 혹은 의지가 있다고 할지라도, 이 경우에는 자신의 의견(혹은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설령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된다고 할지라도, 스스로는 이를 통해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모든 결과를 스스로 감수했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행위로 인해 슬롯에 끼친 폐해와, 쉽게 말해, ‘상계’ 처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일 겁니다.


좀 더 납득이 되실 수 있도록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이와 관련해서 『자유론』의 해당 본문을 보면 밀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사유재산을 가지는 것이 강도행위와 같다는 의견을 신문에 발표하는 것을 금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어느 곡물 거래상 집 앞에 모여든 흥분한 군중들 앞에서 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거나, 이런 의견이 쓰인 플래카드를 내거는 것은 처벌받아야 한다.’


밀이 들고 있는 이 예는 아마 당시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일 겁니다. 그런데 그가 예를 들고 있는 이 두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신문 지상에 공표하는 것과 이해관계에 직접 관련이 있는 사람을 앞에 세워 두고 무리를 이룬 채 그를 힐난하는 방식으로 의견을 표하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해로운 행위를 유발하는 적극성의 유무’일 겁니다.


후자의 경우는 흔히 말하는 ‘조리돌림’으로, 홍위병 같은 행위이지요. 이런 행위는 그 내용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타당할지라도, 그 방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사악한 살인마를 사건 현장에서 구속할 때에도 ‘미란다 법칙’을 지키지 않으면, 그 자에 대한 구속은 법적으로 무효가 됩니다. 이 말인 즉, 의견의 내용과 그것을 표하는 방식은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공인된 공론의 장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내는 것을 막는 것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짓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국가에서는 모든 답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요. 개인의 의견 따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국가라고 해서 전체주의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요. 집단을 이루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그러므로 어떤 공통의 이익을 중심으로 뭉친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되는 개인을 공격할 목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적시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분명 자유주의적인 의도가 아닙니다. 이건 상대의 자유를 박탈하고, 자신들의 방종을 집단의 논리로 합리화하려는 폭력적인 의도가 수반된 행위라는 의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밀이 지적하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 점일 겁니다. 그리고 이는 21세기 바로 현재에도 여전히 아주 빈번하게, 매일 같이 목도되고 있는 모습이라는 건 대부분 동의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②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오직 그때에만 제한될 수 있고, 또 제한되어야 마땅하다.


➜ 이는 ①의 경우에 대한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③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 단지 자기 자신과 관련된 일에서 자신의 취향과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라면, 자신의 바카라임 아래 자신의 의견을 실천할 수 있는 자유가 제약 없이 허용되어야 한다.


➜ 이게 바로 ‘개성의 존중’이라는 개념의 가장 올바른 정의일 겁니다. 이 말에서 알 수 있는 건, 개성이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존중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이겠지요. 여기서 정말 중요한 전제는 ‘다른 사람들과의 이해관계와는 상관없이’라는 단서입니다. 다시 말해, 그 개성의 경계 설정을 어떻게, 어느 수준으로, 얼마나 해야 하는가 라는 매우 골치 아픈 문제가 이 말의 행간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말은 간단명료하지만, 실제로 현실에 적용하는 건 그렇지 않다는 말이지요. ‘자유’나 ‘평등’이라는 개념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늘 이와 관련된 문제로 서로 충돌하고, 슬롯가 분열하고 하는 게 반복되는 세상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2. 개성에 대한 무관심


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 속에는 개성의 자발성의 가치가 평가절하되어 있음.

②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의 자발성이 도덕과 슬롯를 개혁하는 필수조건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임.


⇨ 이 역시 너무도 상식적인 말이지요. 하지만 1번의 경우와 같이 여전히 유효한 말들입니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상식과는 반대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는 인간의 타고난 천성에서 기인하지요. 인간은 아무리 아닌 척을 해도 ‘다름’을 기피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천성이 슬롯경제적인 상황과 맞물리면, 그 힘은 막강해집니다. 물론 그만큼 생산적인 결과를 내놓기도 하지요. 예를 들어 볼까요?


과거 일본의 버블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후 눈부신 경제성장 덕분이었지요.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힘은 회사에 대한 일본인들의 헌신이었다는 진단도 있습니다. 즉, 회사가 잘 되는 게 내가, 내 가족이 잘 되는 것이라는 마인드 덕분이라는 겁니다. 이 마인드가 얼마나 실체적이었냐 하는 것은, 전후 패전국임에도 이 마인드 하나로 서로 매우 유기적으로 뭉쳐 한때는 세계 1위의 부국이라는 수준까지 올라갔던 사실이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마인드를 두고, 흔히 ‘武士道’ 즉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여기는 일본인들도 많이 봤습니다.


하지만 이는 20세기 초, 전 세계적인 패권 다툼 당시에 부정적인 방식으로 현상화되었던, 일본식 전체주의, 즉 과거 군국주의의 저변에 깔린 태도이기도 합니다. 즉, 양날의 칼과 같은 것이지요. 『가면의 고백』, 『금각사』와 같은 유명한 소설을 쓴,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이 무사도 정신에 광적인 낭만주의까지 가미해서 결국에는 스스로 할복을 하는 선택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슬롯는 어떨까요? 제가 보기에는 좋게 보면 과도기, 나쁘게 보면 뭐가 뭔지 몰라서 양극단으로 치닫는 게 바로 현재의 한국슬롯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요즘은 개성의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타인의 영역을 함부로 침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이게 정치 논리화되어서 여러 쟁점을 두고 슬롯가 두 동강 나는 양상이 점차 심해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에는 과거, 개인의 개성을 문제적일 정도로 경시했던, 왜곡된 유교주의, 즉 유교식 집단주의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반발심도 한몫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②번의 내용, 즉, ‘개인의 자발성이 도덕과 슬롯를 개혁하는 필수조건으로 인식되지 못하고, 오히려 이를 방해하는 요소로 여겨지고 있는 것’은 여전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는 21세기 현재에도 만국 공통인 것 같아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사는 반복된다.’라는 것입니다. 90년대 후반쯤인가, 그때 한창 난리였던 유고 내전을 배경을 한 영화 <Before the Rain>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영화인데, 이 영화의 오프닝 즈음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시간은 둥글지 않다.”

제 기억이 맞다면, 이게 발칸 반도의 어느 나라의 속담 비슷한 말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이 말을 들었을 때, 영화는 너무도 우울한데, 저 말은 이상하게 밝게 들려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또렷이 납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는 그저 당시의 이데올로기였던 포스트모던적인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종교적인 희망고문이거나..^^;;

잡담이 길었네요. 아무튼 세상은 거시적으로는 선형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미시적으로는 늘 원운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시대에서든 늘 같은 모습들이 반복되지요. 그리고 그 미시적인 모습은 일종의 땅따먹기 비슷해 보입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겁니다. 누군가가 어떤 빈 땅을 선점하면, 룰은 오로지 그 사람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 중요한 건 ‘선점’이지요. 과거 미국 서부개척시대가 왜 무법천지였는지를 상기해 보시면 잘 납득이 되실 겁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척 시늉은 하겠지만, 이는 어느 정도는 요식행위인 것 같아요. 그리고 거시적으로 슬롯가 발전할수록, 미시적인 원시성은 변함없지만, 이 요식행위는 점차 세련되어 가지요. 그러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그런 미시성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이에요. 아니면 아예 자기들 좋을 대로 이를 망각하거나.


그리고 이제 선점에서 제외된 남은 대다수의 개인들에게 남은 것은 ‘말 잘 듣는 일’ 뿐입니다. 즉, 선점한 자들, 밀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치적 지배자들’이 정한 게임의 법칙을 따르거나 그렇지 않거나 두 가지 선택권 밖에는 안 남는 듯이 보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이 ‘피지배자들’에 대한 지배를 목적으로 한 룰은 전체주의건, 자유주의건, 슬롯주의건, 자본주의건 간에 공통적으로 매우 교묘하게 또 매우 고도로 정교하게 짜여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마치 거미줄 같아요. 한번 그 영역 안에 들어간 곤충은 결코 쉽게 살아서 빠져나올 수 없는 거미줄 말입니다. 그런데 거미는 거미줄을 칠 때 소리 없이 조용히, 눈에 보이지 않게 치지요. 특히 밝은 빛 아래서는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대개 방심을 하지요. ‘아, 햇빛 좋다!’ 하면서요. 거미줄은 대개 깜깜한 밤에 잘 보입니다. 이 비유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다들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그러므로 여기서 게임의 법칙을 따른다면, 잘 살아남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게임판 내에서 크게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 대가로 자신의 개성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지요. 반대로 따르지 않는다면, 광야에 홀로 선 초인처럼 살아야겠지요. 하지만 초인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자율성은 인간의 본성과 거의 역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니까요. 니체가 괜히 ‘신은 죽었다.’라는 표현을 쓴 게 아닙니다. 여기서 신은 진짜 신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제도화된 신, 바로 저 판의 주재자를 뜻하는 것으로도 저는 읽힙니다.


그러므로 밀이 저런 당연해 보이는 말을 굳이 하는 건, 그게 실제 속에서는 ‘전혀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늘 반복해서 깨닫게 되지만, 진리란 언제나 너무나 당연해서 오히려 너무도 무거운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은 이 정도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이어서 3장에 대한 리뷰를 계속 진행하도록 할게요. 다음 주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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