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어가기 2 -도스토예프스키
안녕하세요. 준쿠스입니다.
벌써 한 주가 훌쩍 지나고, 다시 온라인카지노를 올리는 시간이 돌아왔네요.
제 방 창문 앞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있어요. 얼마 전까지는 꽃이 만개했었는데,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짙은 청록색으로 바뀌어서 시원한 그늘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수국과 장미꽃,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짙은 쪽빛의 꽃들이 한가득씩 피어나고 있어요. 장미꽃은 하루가 다르게 봉우리가 커지고 있고, 수국 역시 그러합니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이 예쁜 꽃들이 가득 만개한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번 주는 『자유론』은 잠시 쉬고, 두 번째 인터미션을 가질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기회로 삼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가장 의미심장한 이야기 하나를 맛보기 수준으로만 살짝 다뤄볼 생각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바카라이 하나쯤은 있을 겁니다. 저는 많은 바카라을 읽은 편이지만, 모든 바카라들이 다 가치가 있는 건 아닙니다. 누군가 제게 인생을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아마도 이렇게 답할 것 같아요. 바로 ‘고양감’을 느끼기 위해서라고 말이지요.
제가 바카라을 읽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고양감’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제게 고양감을 주는 바카라은 사실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점점 적어지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제게 의미가 있던 바카라도 이제는 그 의미가 희석된 것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사실 좀 많이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삶의 이유가 될 수 있는 즐거움이 그만큼 상실되어 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제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는 바카라들은 몇 권 있습니다. 바로 파스칼의 『팡세』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제게 있어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지 못하는 삶은 반쪽짜리 삶처럼 느껴집니다. 어떤 때에는 이 작가의 글을 읽기 위해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작품들은 저를 고양시킵니다.
<도스토예프스키>
그의 작품들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로 『악령』입니다. 하지만 이번 시간에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 작품에 관한 것이 아니에요. 이번 시간에 살짝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바로 ‘대심문관’에 관한 것입니다.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독립된 작품은 아닙니다. 아마도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이에 관한 본격적인 소설도 나왔을지도 모르지요. 아무튼 이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둘째 이반이 막내 알로샤에게 들려주는 긴 줄글로 된 자작시입니다.
사실, 이걸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끝도 없을 겁니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이야기이니까요. 하지만 이게 가능하려면, 이반 카라마조프라는 인물에 대해 먼저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이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따브로긴이나, 미쉬낀, 로고진, 키릴로프, 라스꼴리니코프, 심지어는 베르호벤스키와 같은 천박한 악인까지 도스토예프스키가 소설 속에 투영해 놓은, 매우 실존적인 인물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지요. 즉 도스토프예스키를 읽는다는 것은 매우 총체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런 걸 다룰 수는 없습니다. 그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세상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부분을 뽑아 조금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전에 하나 양해를 구한다면, 이반의 이 자작시는 예수와 그를 만난 대심문관, 즉 예수회의 이단 재판을 총괄하던 90세의 늙은 노인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에 관한 것이기에, 종교적인 표현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요즘 분들은 종교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색안경을 끼고 보시는 분들이 많으시지요. 그런데 조금 웃긴 것은, 그런 분들의 그런 태도조차도 제가 보기에는 일종의 종교적인 태도로 보입니다. 즉, 무교임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신봉하는 태도, 즉 무교의 신념에 대한 종교적 신념이라고 할까요? 종교적인 태도가 보이는 나쁜 점은 그 무조건적인 배타성에 있으니까요. 바로 이 점에서 서로 매우 닮은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저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니, 오해 마시고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율성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유의지’이지요. 여러분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이 박히는 것을 회피하지 않은 행위나, 산상수훈의 이야기, 그리고 황야에서 세 가지 유혹을 이겨내는 이야기 등을 읽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저는 ‘자유의지’가 떠오릅니다. <마태의 복음서>를 보면,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스스로를 부인하고 스스로의 십자가를 지고서 나를 좇게 될 것이다.’
여기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건, 분명 ‘자유의지’이지요. 기독교인들 중에는 예수가 죽어가면서 흘린 피를 ‘보혈’이라고 부르며, 감동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즉,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라고 여기면서 감격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태복음서의 저 말을 보면, 예수는 단지 파르마코스, 즉 희생양이 되기 위해서 저 피를 흘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 일부는 이 점에 대해서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좀 언급을 회피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아예 무관심하지요. 그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를 보며 다음과 같이 차갑게 말합니다.
“그들이 당신이 한 행동을 그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그들에게 너무 많은 존중을 보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이상 동정하지 않고, 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당신이 그들을 덜 존중했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덜 요구하게 되었을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훨씬 더 사랑을 받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짊어져야 할 짐이 훨씬 더 가벼워졌을 터이니까요!”
여기서 대심문관은 로마 가톨릭 교회로 상징되는 일종의 적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알로샤가 이반에게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지지요.
“형, 나는 아직 잘 이해가 가질 않아. 그게 무슨 말이지? 그 노인은 뭐랄까, ‘qui pro quo’ 같은 거야?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여기서 ‘qui pro quo’의 의미는 “one for the other” 즉 두 개의 정체성이 혼동되어 서로가 서로를 반영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이반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모두가 인간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거든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예수는 아무런 기만 없는 반면, 대심문관은 기만을 통한다는 점이지요. 논리적으로 이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지만, 이것이 양립하는 게 실존입니다. 소설은 인간만이 하는 행위이지요. 즉, 거짓을 통해 진실을 이야기하는 행위가 곧 소설입니다. 즉 뭔가 종교와 서로 닮았지요. 그리고 이런 아이러니를 드러내는 게 소설의 목적입니다. 제가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 점에 있어 그만큼 진실한 작가는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길어질 것 같으니, 이제 마지막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글을 줄이겠습니다.
대심문관은 예수에게 다음과 같이 도전적인 단언을 합니다. 이 장면이 사실은 매우 길기 때문에, 그냥 매우 간략하게 요약하겠습니다.
“인간은 선악에 대한 앎과 이를 통한 선택의 자유와 같은 것보다는 평화를, 심지어는 그 평화가 죽음과 같은 것일지라도 그 평화를 더 좋아합니다. 그들은 스스로 알기보다는 남이 알려주기를 원하고, 반역을 일삼으면서도 항상 숭배할 것을 찾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기적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신을 믿는다면 그것은 기적을 믿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기적’, ‘미스터리’, 그리고 ‘권위’ 이 세 가지, 이 삼위일체야말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조건입니다.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세 가지의 ‘의지할 것들’이지, 결코 ‘자유의지’ 같은 게 아닙니다! 진실은 인간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평화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혹은 결국에는 거짓을 택할 것입니다!”
예수가 다른 두 명의 잡범들과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이 박혔을 때, 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지요. “너희는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가리라.”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당연히 비웃음만 당할 뿐이었고, 결국 이 ‘기적’은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는 죽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백치』를 쓰기 전, 매우 인상 깊게 봤다고 하는 홀바인의 그 그림 속 모습처럼 말이지요.
<그리스도의 죽음 by 한스 홀바인>
저는 이게 아마도 실제의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두고 『악령』에서 키릴로프는 베르호벤스키에게 다음과 같은 격정을 쏟아냅니다.
“만약 자연법칙이 이 사람마저 동정하지 않고 자신의 기적조차 안타까워하지 않으며, 그를 거짓 속에 살게 하고 거짓 때문에 죽게 만든다면, 결국 전 행성은 거짓이고, 거짓과 어리석은 조소 위에 서 있는 거지.”
여기서 '이 사람'은 바로 예수를 지칭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도 『악령』을 읽어보지 못하신 분들이 더 많으실 게 분명하기에, 설명드린다면, 키릴로프는 ‘무신론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그는 신이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신이 없는 상태를 견딜 수 없어합니다. 그래서 그가 결국 신처럼 믿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자유의지이지요. 그리고 이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세상에 증명하기 위해 그는 자살을 해야 한다고 믿기 시작하고, 이 믿음은 그의 가슴속에서 유일한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서, 그는 결국 권총으로 자신의 두개골을 쏴버립니다. 그리고 죽기 전에 이렇게 믿었지요. 죽음과 동시에 다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어느 지점에서인가 미치기 시작한 것이에요.
하지만 그는 매우 선량한 사람이었습니다. 선량하지만 나약한 인간. 지구상 인간 군상들 중 한 집합을 상징하는 전형 중 하나입니다. 대심문관이 말한 저 가시 같은 말,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자유의지가 아니다. 그건 신(神)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며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든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기적을 바라는 마음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것 같은 기만과, 어느 정도의 무지, 그리고 이 양자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권위’ 뿐이다.’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된 인물이기도 하지요.
오늘의 글은 이 정도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으시겠지만, 그래도 소수는 있겠지요. 제 온라인카지노는 점차 화석처럼 변해가는 소수를 위한 공간이니까요. 일종의 미세한 흔적 비슷한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사는 인간들도 있었다는 흔적 말입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다시 밀의 『자유론』에 대한 리뷰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