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로 월별 독서를 기록하는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https://my-reading-calendar-20260715.assa41696.chatgpt.site/ 관심이 있으면 사용하길 바란다.
7월 결산을 하기에는 날짜가 많이 늦어버렸다. 그래도 내가 만든 사이트를 자랑도 할 겸, 또 오랜만에 글을 올릴 겸 노트북을 켰다. 앞으로는 한 달에 글 하나씩은 올리고자 한다. 그동안 유아론에 가까운 관념론자였기에, 별로 글을 써서 남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요즘 머릿속에서 관념론의 비중이 조금 줄었다. 여전히 칸트의 초월적 관념론에 매력을 느끼지만, 쇼펜하우어와 니체를 읽으며 생각이 바뀌고 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해석한 칸트의 물자체인 '의지'를 단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선대의 철학자들이 원인과 결과를 바꿔치기했다고 말한다. 먼저 존재하는 것은 언제나 감각적인 세계다. 피안의 세계는 추론으로부터 생겨나고, 결코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런데 철학자들은 이를 교묘하게 바꿔치기한다. 그들은 피안의 세계로'부터' 감각되는 세계가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반면 우리는 감각 세계 바깥은 알 수 없다. 언제나 현존하는 모든 것은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감각세계다. 철학자들은 노예의 도덕을 추종하기에 감각되는 세계의 중요성을 박탈해왔다. 이는 심리적, 병리적 문제다. 철학자들은 유약하고 염세적이고 비관적이고 병들어 있기 때문에, 감각 세계에서 벗어나 피안의 세계에 가고파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그토록 바랐던 것도,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마리를 빚지고 있다는 말도 그때문이었다.
나는 니체만큼 래디컬하진 않지만(여전히 수학의 보편성을 생각하면 칸트적 관념론이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개체로서의 인간 삶은 관념론에서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니체의 편을 들게 된다.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관념론에서 인간 개체의 경험은 연극의 관객에 비유할 수 있다. 그는 미리 짜여진 연극의 형식과 각본에 영향을 미칠 능력이 없다. 자유는 사물 자체의 것이고, 현상은 칸트에게서는 시공간과 범주들에 의해, 쇼펜하우어에서는 인과율과 충분근거율에 의해 규정된다. 칸트의 실천이성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칸트는 도덕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도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술어일까? 그는 합목적성을 위해 앞뒤를 은밀히 바꾸고 있다. 자유로울 수 있음이 먼저 온전히 증명되어야 한다.
니체는 이에 반해 인간이 연극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자유는 종교가 인간에게 바카라임지우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고도 연극 속에서 그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가 연극에 참여하는 동안에는 그에게 각본이나 감독의 존재에 관한 추론이 필요하지 않다. 그의 역할이 끝나면 그는 연극에서 퇴장한다. 그뿐이다. 그는 그 밖의 것들을 추론할 수도 없고 추론할 필요도 없다. 나는 이렇게 연극에 참여하는 태도를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이해했다. 그리고 연극 배우가 역할이 끝나지도 않은 때에 감히 각본과 감독에 관해 추론하는 태도를 아폴론적이라고 이해했다. 아폴론적이면서 배역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면 그는 데카당스이다. 나는 이제까지 분명 데카당스로 살고 있었다...
세계관이 바뀌며 일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맡은 역할에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 아무리 불합리하고 부조리해도 결국 내가 맡은 역할이다. 얼렁뚱땅 내던져진 연극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려는, 살아내려는 태도를 나는 바카라임감 있다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