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글

by왜살지

살 것 같았다가 죽을 것 같았다가 하는 일상. 그럼에도 어찌저찌 살아진다.


학교 자율감사가 끝났다. 나는 입직하고 지금까지의 짧은 기간동안 300만원 상당의 보수를 덜 줬고 100만원 상당의 보수를 더 줬다. 그럼에도 공무원은 살아 있음이 업적이다. 7월 1일 자로 시보가 해제되었다.


퇴근하고 바로 독서실에 가고 있다. 순수 이성 비판을 재독중이다. 칸트의 철학 체계는 아름답다. 그는 자신의 체계를 기관이라 칭하고 건축물에 비유했다. 건물의 기초에 놓인 비판은 건물을 단단하게 하고 건물 전체에 규칙을 부여한다. '가능한 경험을 위한 선험적 조건'이라는 기초에서 나오는 광휘는 건물 전체를 감싼다.

그러나 자유의 원인성에 대한 부분만은 의아하다. 경험적 계열에서 자유가 벗어날 수 있고, 자유가 경험적 계열의 원인이 아닌 현상들의 예지적 원인일 뿐이라면, 현상만이 주어질 뿐인 우리에게 그런 자유의 원인성이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현상들의 자연필연성만이 주어질 뿐이고, 현상들의 예지적 원인성은 경험적 계열에 들어오지도 인식되지도 않는데. (그는 인간이 실천적 존재라고 전제함으로써 자신이 정초한 가능한 경험들의 조건인 지성개념들과 범주들의 적용을 무너뜨리고 있다.)

칸트의 개념 중 '표상들의 유희'가 마음에 든다. 그는 이 단어로 객관적 실재성 없음을 의미하고자 했겠지만, 객관적 실재성이 야기하는 것은 경험의 기계화일 뿐이다.

표상들의 유희가 주어질 수 없다면, 내가 표상들로 유희할 것이다. 객관적 실재를 재구성할 것이다. 이것이 카프카가 말한 소설 작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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