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살아있어요

by왜살지

이곳에 글을 올리지 않은지 꽤 오래됐다. 일에 조금 적응했기 때문일 수 있겠다. 이제 일이 내 숨통을 조이는 살인 기계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곳에 표출할 분노가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이제 일은 소나 말이 옮겨야 하는 짐처럼 느껴질 뿐이다.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옮겨야 하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그런 짐. 나는 스스로 그런 짐을 짊어지려 한 것에(실상 그렇게 되도록 등떠밀렸을 뿐이지만) 날 바카라망해왔다. 이제 그러지 않으려 한다. 나의 죄는 그보다 더 선천적인 곳에 있다.

일에 적응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퇴근 후 글이 잘 읽히진 않는다. 피곤하기도 하고 나의 시간을 노동에 빼앗겼다는 자각에 대한 보상심리도 밀려온다. 자주 수음하고 게임을 한다. 그러다 보면 저녁 시간이 훅 지나가버려 바카라상 앞에 앉아도 집중이 되지 않고 졸음이 오곤 한다.

그런 시간들은 나에게 고문에 가깝다. 삶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내용보다는 삶이 속삭이는 질문들에 있는 듯하다. 아주 작은 삶의 편린들에서조차 들릴 듯 말듯 읊조리는 질문들이 있다. 그것들에 귀기울이기를 그치는 순간 삶은 죽음의 유예일 뿐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삶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게 한다. 무지는 삶의 속성이기도 하면서 조건이다.

그러니 이유도 모른 채 죽음으로 이끌리는 와중에도 읽기를 멈출 수는 없다. 그동안 순수이성비판 1권을 읽고 돈키호테를 읽었다. 이제 순수이성비판 2권을 읽는 중이다. 1권에서는 경험 인식의 조건들(감성과 지성)에 대해 다뤘다. 2권에서는 지성 개념의 원칙인 이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성의 원천은 경험이 아닌 지성 개념들이기 때문에, 이성의 이념에는 실재적 타당성이 없다. 다만 추리의 분석적 타당성만 있을 뿐이므로, 단지 개념일 뿐이다. 그러나 이성은 실천적으로는 사용될 수 있다. 도덕, 자유, 종교 등 실천적 이념들은 경험 내용에 제약을 받지 않고 제약을 받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는 재독이었다. 돈키호테는 첫 번째 소설로, 산문으로 된 첫 번째 서사 작품이다. 산문은 일상의 언어기에, 산문은 서사를 현실 법칙 위에 세운다. 운문으로 쓰인 서사시에서 인간은 현실 법칙을 따르지 않은 채 묘사됐다. 기사 문학의 주인공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거인과 맞서 싸우거나, 하늘을 날아다니거나, 칼을 맞아도 다치지 않는다. 반면 세르반테스는 현실 법칙에 철저히 따르는 인간을 창조했다. 돈키호테는 맞으면 아파하고, 잘 달리지도 못하는 말을 타다가 땅바닥에 꼬꾸라지고, 풍차를 거인인 줄 알고 돌진한다. 그는 가련하고 미친 인간이다.

이렇듯 광기라는 요소는 작품을 존립시키는 조건이기도 한 허구성을 현실 법칙에 편입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 하나의 순환이 만들어진다.-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쓰이기 위해서는 먼저 돈키호테가 창조되어야 했고, 광기에 빠져 모험을 떠나야 했다. 그렇다면 허구는 소설의 필요조건인데, 다시금 소설의 정의로서 현실 법칙이 그것을(허구를 광기로서) 포섭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따른 무한 퇴행이 하나의 질문 주위를 끊임없이 맴돈다. '진실이란 무엇인가?' 산문적 서사라는 소설의 정의가 이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산문의 일상성과 서사의 허구성이 꼬리 잡기 놀이를 하는 강아지들처럼 끝없이 서로의 뒤로 물러나며 작품의 모든 음절마다 이 질문을 읊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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