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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의 얼굴 뒤에 난민을 세우는 일

byMinseung Kang

2020년 11월 6일 오후 2시, 서울 을지로 소재 유엔난민기구(UNHCR) 한국대표부 사무실을 찾았다. 공보 담당자들을 만나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의 송년특집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해 12월 14일이면 유엔난민기구가 창립 70주년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의 난민 문제를 해결하고 3년 만에 사라질 예정이었던 임시기구가 70년 동안 존속했다는 것은 축하할 만한 이력이면서 동시에 실패의 연대기였다. 전쟁과 박해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기구가 상설기구가 된 것이었다. 그 역설을 특집에 담고 싶었다. 그러려면 대중 앞에서 난민 문제를 꾸준하고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온 누군가가 필요했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이자 영화배우 정우성이 적임자였다.


첫 회의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했던 건 역설적으로 그 이름이 가진 힘이었다. 난민을 이야기하러 오는 자리에서 정우성이라는 ‘구경거리’가 난민을 밀어내지 않게 하자. 유명인의 얼굴과 작품과 근황을 소비한 뒤 난민 이야기를 선행의 장식처럼 덧붙이는 보통의 인터뷰가 되어서는 안 됐다. 정우성은 시청자의 관심을 끌기 위한 미끼가 아니라 좀처럼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건네는 통로로서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 유명세를 없앨 수는 없었다. 우리가 찾아야 할 방도는 그 유명세가 향하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친선대사 한 사람에게 난민 문제 전체의 옳고 그름을 묻는 구도가 되면 인터뷰는 쉽게 찬반 토론이나 유명인의 소신을 심판하는 자리로 변한다. 유엔난민기구의 역사와 공식 입장은 제임스 린치 한국대표가 설명하고, 담당 공보관이 현장에서 통역하며, 정우성은 자신이 직접 찾아간 난민촌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야기하도록 역할을 나누었다. 제도의 언어와 현장의 언어를 함께 놓아야 난민을 추상적인 인권의 대상으로도, 유명인의 선행을 돋보이게 하는 배경으로도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유엔난민기구는 창립 70주년의 의미와 더불어 특히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코로나19가 난민들의 삶에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해 가중된 고통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난민촌과 임시수용소는 좁은 공간에 지나치게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여러 가족이 화장실과 급수시설을 함께 사용했다. 손을 자주 씻고 다른 사람과 거리를 두라는 방역수칙은 깨끗한 물과 충분한 공간이 있다는 전제에서만 가능한 말이었다. 천막 하나를 가족 전체가 쓰고 아파도 격리될 방이나 치료받을 병원이 없는 곳에서 감염병은 개인의 위생 문제가 아니라 거주환경 자체의 문제였다. 전쟁과 박해, 과밀한 수용소와 가난 위에 감염병이 한 겹 더 쌓인 것이었다.


회사로 돌아와서는 그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일을 몇 편의 영상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에티오피아 티그라이에서 수단으로 넘어온 피란민, 경제위기와 베이루트 폭발 속에서 살아가던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화재로 무너진 그리스 레스보스섬의 모리아 수용소,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갇힌 로힝야 난민과 바산차르섬 이주 문제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야 했다. 외신 영상을 확보하고 번역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화면 속 사람들이 어느 국경을 건넜는지, 왜 그곳에 모이게 됐는지, 수용소의 규모와 인구가 얼마인지, 짧은 인터뷰 한마디가 어떤 역사적 배경 위에서 나온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전쟁과 화재와 질병을 몇 분 안에 몰아넣으면 난민은 다시 불행한 사람들의 몽타주로만 남는다. 난민이 된 결과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떤 힘으로 이들을 살던 곳에서 밀어냈는지를 설명해야 했다.


12월 중순부터는 첫 대본과 큐시트를 만들고 질문의 순서와 표현을 계속 바꾸었다. 티그라이에서 수단으로 넘어온 사람들의 영상,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 자료, 그리스와 로힝야 관련 외신을 차례로 받아 인제스트하고 번역했다. 화면 속 장소와 인물, 발생 시점과 숫자를 확인하고 번역된 문장이 실제 발언의 뜻을 벗어나지 않는지 대조했다. 첫 번째 VCR에는 2020년 난민들이 처한 공간을, 두 번째 VCR에는 국적과 귀환의 희망마저 빼앗긴 로힝야의 시간을 담았다. 인터뷰의 질문도 차츰 ‘난민을 왜 도와야 하는가’에서 ‘우리는 난민을 무엇이라고 오해하고 있는가’로 이동했다.


사전녹화는 12월 19일 KBS TS-3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여느 때처럼 윤수영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고 박종훈 기자가 고정 패널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의 맞은편에는 제임스 린치 대표와 정우성이 자리했다. 정우성은 첫인사에서 자신을 배우가 아닌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소개했다. 그러나 윤수영 아나운서는 그를 옆에 두고 방송하니 스튜디오가 환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가 준비 과정 내내 우려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정우성은 어느 자리에 있어도 먼저 배우로 발견되는 사람이었다. 직함을 아무리 정확하게 소개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이미 그의 얼굴에 도착해 있었다.


다만 그는 그 시선을 오래 자신에게 붙들어두지 않았다. 자신이 가끔 시청하던 프로그램이 세계의 중요한 문제를 깊이 다뤄왔다고 말한 뒤, 연말에 난민 문제를 이야기할 자리를 마련해준 데 대한 감사로 곧바로 화제를 옮겼다. 녹화가 진행될수록 스튜디오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처음에는 정우성이 출연한 특별한 방송이라는 기색이 강했지만 그가 방문했던 지역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대화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난민에게로 이동했다. 그는 준비된 구호를 낭독하지 않았다. 질문을 받은 뒤 기억을 더듬고 단어를 고쳐가며 자신이 현장에서 알게 된 것을 설명했다. 특히 제주 이야기에 이르렀을 때에는 자신을 향한 비난을 해명하는 데 시간을 쓰기보다 당시 유통된 정보가 사실에 가까웠는지를 되묻는 데 집중했다.


그는 유엔난민기구와 처음 일할 때 자신도 난민을 어려움에 처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정도로, 피상적으로 바라봤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네팔과 남수단, 레바논과 이라크, 방글라데시를 다니고 예멘 난민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지부티와 말레이시아까지 찾아가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난민은 단지 가난하거나 집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과 폭력, 박해와 국가의 실패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야 할 정치공동체에서 밀려난 사람이었다. 식량과 천막의 부족은 그 결과이지 난민 문제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들을 난민으로 만든 것은 대부분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질서와 폭력이었다.


정우성은 이들의 시간이 한국의 역사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분단과 한국전쟁을 조금만 되돌아보면 집을 버리고 국경과 전선을 넘어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난민촌에서 그가 먼저 발견한 것은 비참함만이 아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다시 짓고 가족의 삶을 회복하려는 사람들의 의지였다. 아무런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뒤의 생활을 계획했다. 그에게 난민은 절망의 크기를 증명하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기반을 잃고도 미래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는 존재였다.


2019년 말 전 세계 강제이주민은 7,950만 명에 이르렀다. 세계 인구 97명 가운데 한 명이 살던 곳에서 밀려난 셈이었다. 이 가운데 4,570만 명은 국경조차 넘지 못한 채 자기 나라 안에서 떠도는 국내실향민이었고, 약 2,600만 명이 난민, 420만 명이 난민 신청자였다. 여기에 국외로 떠나 보호가 필요한 베네수엘라인 약 360만 명이 별도의 범주로 집계됐다. 난민을 부유한 나라의 국경을 향해 몰려오는 거대한 행렬로 상상하는 시선과 달리 강제이주민의 다수는 자국 안에 갇혀 있었고, 국경을 넘은 사람들도 대부분 고향과 가까운 이웃 나라에 머물렀다. 난민을 바라보는 슬롯가 상상하는 침입의 규모와 난민이 실제로 감당하는 추방의 규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에티오피아 티그라이에서 벌어진 일도 오랜 민족감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충돌이었다.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은 1991년 이후 연방정부의 핵심 세력으로 장기간 권력을 행사했지만, 2018년 아비 아머드가 총리가 된 뒤 중앙정치에서 밀려났다. 아비가 기존 집권연합을 번영당으로 재편하자 티그라이인민해방전선은 합류를 거부했다. 코로나19를 이유로 총선이 연기되자 티그라이주는 2020년 9월 자체 선거를 실시했고, 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서로의 정당성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1월 티그라이 세력이 연방군 북부사령부를 공격했다는 연방정부의 주장과 함께 군사작전이 시작됐다. 민간인 학살과 보복, 통신 차단이 이어졌고 수만 명이 국경을 넘어 수단의 함다예트로 몰려갔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물과 음식, 잠자리의 부족을 견뎌야 했다.


시리아 난민의 역사는 2011년 남부 도시 다라에서 반정부 낙서를 쓴 청소년들이 체포되고 고문당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에 정부가 무력으로 대응하면서 저항은 전국으로 번졌다. 아사드 정권의 무력진압과 반군의 분열, 이슬람국가의 등장, 주변국과 강대국의 개입이 겹치며 시리아는 여러 개의 전쟁이 동시에 진행되는 땅이 됐다. 수백만 명이 국경을 넘었고, 인구에 견주어 가장 많은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인 레바논은 자국의 경제위기와 정치적 혼란까지 함께 감당해야 했다.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은 이미 무너지고 있던 도시의 생활기반을 다시 파괴했다. 그 안에서 살아가던 시리아 난민들에게 실업과 식량 부족, 감염병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었다.


시리아 난민 위기를 세계의 눈앞에 가져다 놓은 사람은 살아남아 증언한 정치인이나 활동가가 아니라 세 살배기 아이였다. 알란 쿠르디는 시리아 북부 코바니 출신의 쿠르드계 아이였다. 가족은 이슬람국가의 공격을 피해 시리아를 떠났고, 2015년 9월 2일 터키 보드룸에서 그리스 코스섬으로 가는 작은 고무보트에 올랐다. 출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배가 뒤집혔다. 알란과 다섯 살 형 갈리프, 어머니 레한은 바다에서 숨졌고 아버지 압둘라만 살아남았다. 그날 아침 알란의 몸은 보드룸 인근 해변에서 얼굴을 모래에 묻은 채 발견됐다. 닐뤼페르 데미르가 찍은 그 사진은 지중해를 건너다 죽은 수많은 사람을 하나의 얼굴로 바꾸었다. 세계는 그제야 난민 위기를 숫자가 아니라 한 아이에게 일어난 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아이의 가족이 향하려 했던 그리스의 섬들은 유럽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대기실이었다. 2016년 유럽연합과 튀르키예의 합의 이후 그리스 섬에 도착한 난민들은 망명 심사가 끝날 때까지 섬을 떠나기 어려워졌다. 본토로 보내지지 못한 사람들이 계속 쌓이면서 모리아 수용소는 보호시설이 아니라 유럽 난민정바카라의 병목이 됐다. 2천∼3천 명 정도를 수용하도록 만들어진 공간에 2020년에는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머물렀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자 모리아는 봉쇄됐고, 그 상태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불이 난 뒤 1만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수용소 주변의 도로와 다리 위에서 노숙했다. 피난처에서 다시 피란민이 된 것이다. 코로나19는 모두에게 같은 바이러스였지만 물과 화장실을 함께 써야 하고 아파도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같은 위험이 아니었다. 화재의 정확한 경위와 바카라임을 둘러싼 논란과 별개로, 불 한 번에 만 명이 넘는 사람이 잠잘 곳을 잃는 구조는 우연이 아니었다.


모리아가 유럽의 국경에서 난민 보호를 끝없는 대기로 바꾼 공간이었다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는 한 국가가 특정 집단의 시민권을 지운 결과가 국경 너머에 쌓인 공간이었다. 정우성이 가장 깊이 붙들고 이야기한 곳도 이곳이었다. 로힝야가 난민이 된 과정은 내전보다 국적의 박탈에 가까웠다.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무슬림계 로힝야는 1982년 시민권법의 차별적인 요건과 그 배제적 운용으로 대부분 시민권을 인정받지 못했다. 국가가 이들을 정식 민족집단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이동과 교육, 취업과 결혼까지 행정적 통제의 대상이 됐다. 살던 땅은 있었지만 그 땅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됐다.


2017년 로힝야 무장세력이 경찰초소를 공격하자 미얀마군은 이를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대규모 군사작전을 벌였다. 마을이 불탔고 민간인 살해와 성폭력에 관한 증언이 이어졌다. 70만 명이 넘는 로힝야가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달아났다. 먼저 피신해 있던 사람들까지 합쳐 콕스바자르 일대에는 9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모였다. 쿠투팔롱과 주변 확장지구에는 1제곱킬로미터에 4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는 구역까지 생겼다. 대나무와 비닐로 만든 거처가 산비탈을 뒤덮었고, 우기에는 산사태와 홍수를, 건기에는 화재를 걱정해야 했다. 감염병이 번지면 사람 사이의 거리를 확보하는 것부터 불가능한 장소였다.


정우성이 로힝야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2014년 네팔에서였다. 한 현장 활동가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로힝야를 꼽았다. 다른 난민들은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집을 다시 짓겠다고 말했지만, 로힝야에게는 그 희망을 보장해줄 국가가 없었다. 미얀마가 그들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돌아갈 고향이 있어도 돌아갈 권리를 증명할 수 없었다. 정우성은 대규모 탈출이 벌어진 2017년 콕스바자르를 방문했고 2019년에 다시 그곳을 찾았다. 이전에 만났던 사람이 여전히 같은 캠프, 같은 절망 속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다시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반가워야 할 재회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는 곳에서 희망을 말하는 일은 때로 위로가 아니라 잔인한 요구가 된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과밀한 콕스바자르의 인구를 줄이겠다며 로힝야 10만 명을 벵골만의 바산차르섬으로 옮기는 계획을 추진했다. 육지에서 배로 몇 시간을 가야 하는 외딴 충적섬이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제방과 주거시설을 갖춘 안전한 정착지라고 설명했지만 난민과 인권단체들은 사이클론과 침수의 위험뿐 아니라 그곳에서 실제로 생계를 꾸릴 수 있는지, 가족이 함께 이동하고 다시 육지로 돌아올 수 있는지, 무엇보다 이주가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우려했다. 과밀한 수용소의 문제를 해결한다며 사람들을 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긴다면 보호와 격리의 경계는 흐려진다. 난민을 안전하게 살게 하는 일보다 난민이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 앞설 때 수용시설은 피난처가 아니라 추방을 연장하는 장치가 된다.


해외의 거대한 난민촌보다 정우성에게 더 어려웠던 현장은 우리나라 제주였다고 한다. 예멘에서는 2011년 반정부 시위 이후 정치적 이행이 실패했고, 후티 반군이 2014년 수도 사나를 장악했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연합군이 개입하면서 내전은 지역의 대리전으로 확대됐다. 공습과 교전, 봉쇄와 기반시설의 붕괴가 이어졌고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해졌다. 예멘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무비자로 머물 수 있던 말레이시아로 갔다. 체류기간이 끝나갈 무렵 쿠알라룸푸르와 제주를 연결하는 직항편과 제주도의 무사증 제도를 알게 된 사람들이 제주로 이동했다. 그렇게 2018년 1월부터 5월까지 500명이 넘는 예멘인이 제주에 도착했다.


난민은 그때까지 한국인에게 주로 뉴스 화면 속의 존재였다. 제주에 온 예멘인들은 난민이 처음으로 우리 곁의 구체적인 사람이 된 사건이었다. 정부는 이들의 제주도 밖 이동을 제한했고, 뒤이어 예멘을 무사증 입국 대상에서 제외했다. 온라인에서는 이들이 범죄를 일으키고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며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주장이 빠르게 퍼졌다. 난민 신청자들의 입국을 막고 추방하라는 국민청원에는 70만 명이 넘게 참여했다. 아직 발생하지 않은 범죄가 이미 예고된 사실처럼 유통됐고, 예멘인들은 무엇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위험한 집단이 됐다.


녹화에서 윤수영 아나운서는 제주 예멘 난민 입국 당시 정우성이 소신을 밝혔다가 많은 비난을 받았던 일을 꺼냈다. 정우성은 그 시기 제주평화포럼 일정으로 제주에 갔다가 곧바로 예멘인들을 만나러 갔다고 설명했다. 그는 난민을 둘러싼 우려의 목소리도 들어야 한다고 했다. 다만 그 우려가 사실에 가까운지는 반드시 따져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당시에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가짜뉴스가 온라인을 순환하면서 공포가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우려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그 우려의 내용이 진실이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심사 대상이 된 예멘인 484명 가운데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두 명이었다. 412명은 전쟁 중인 예멘으로 돌려보낼 수 없어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았고, 56명은 불인정, 14명은 직권 종료됐다. 이들은 모두 ‘예멘 난민’으로 불렸지만 실제 법적 지위와 처지는 서로 달랐다. 정우성은 큰 우려와 달리 인도적 체류를 허가받은 사람들이 한국 슬롯에서 조용히 생활하며 스스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별도의 장기 추적조사를 제시한 결론이 아니라 제주에서 이들을 만난 뒤 상황을 지켜본 친선대사로서의 판단이었다.


난민이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말과 난민이 범죄자라는 말 사이에는 긴 거리가 있다. 혐오는 그 거리를 순식간에 지운다. 가능성을 사실로, 개인의 일탈을 집단의 본성으로, 불안정한 행정적 지위를 도덕적 결함으로 바꾼다. 정우성의 설명처럼 당시 난민만을 별도로 떼어 위험성을 입증할 범죄 통계는 제시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난민의 범죄 가능성만을 특별히 집계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다. 일자리 문제도 다르지 않았다. 제임스 린치 대표는 당시 한국에서 난민으로 인정된 사람의 수가 노동시장 전체를 흔들 만한 규모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우성 역시 언어와 학력 인정, 체류자격의 제약 때문에 이들이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가 주로 저임금 임시직에 한정돼 있다면서, 난민이 한국 청년과 같은 조건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다투고 있다는 상상부터 현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제주가 한국 슬롯에 남긴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 유엔난민기구는 우리나라 성인 1,016명을 대상으로 난민 인식조사를 실시했다. 난민 수용에 찬성한다는 응답은 2018년 24%에서 2020년 33%로 늘었고, 반대는 56%에서 53%로 줄었다. 제임스 린치 대표는 이를 긍정적인 변화로 평가했다. 그러나 정우성은 슬롯의 변화를 실감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치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은 중요하지만 충돌하는 이해와 감정이 바뀌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분위기에 맞춰 낙관을 보태기보다 자신이 체감한 현실과 조사 결과 사이의 거리를 남겨두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국인의 유엔난민기구 민간 후원 규모를 이야기했다. 한국의 민간 후원은 세계 최상위권이었다. 정우성은 그 수치 곁에 조용히 난민을 돕는 사람들이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들은 대개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남에게 동참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반대하는 목소리는 크고 반복적으로 들리는 반면 매달 후원금을 조용히 보내는 사람들의 행동은 하나의 여론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는 난민을 둘러싼 찬반의 수치보다 그렇게 말없이 지속되는 행동에서 더 큰 가능성을 보았다.


그 조용한 사람들의 존재는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수많은 조선인이 삶의 터전을 잃고 만주와 연해주, 일본과 중국 각지로 흩어졌다. 해방 뒤에는 귀환민이 한꺼번에 돌아왔고 분단과 전쟁은 다시 월남민과 피란민을 만들었다. 이들은 정부가 마련한 충분한 보호 속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낯선 도시의 빈 땅에 집을 짓고 시장과 학교를 만들며 무너진 슬롯를 다시 움직였다. 법적으로 오늘날의 난민과 동일한 지위였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이 고향을 잃고 이동한 사람들의 노동과 생존 위에서 재건됐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엄밀히 말하면 한국은 난민이 세운 나라라기보다 피란민과 월남민, 귀환민이 다시 세운 나라였다. 우리에게 피란은 생존이었고 타인의 피란은 침입이라고 말하는 순간 역사는 경험이 아니라 자기 예외성을 꾸미는 신화가 된다.


12월 26일 밤,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정우성이 출연한 〈특파원 보고 세계는 지금〉이 마침내 텔레비전 방송과 동시에 유튜브에서도 실시간으로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지켜본 우리 프로그램의 유튜브 실시간 방송에서는 대체로 시간이 흐를수록 시청자가 늘어났다. 먼저 들어온 시청자가 머물고 새로운 시청자가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정우성이 화면에 등장해 난민 이야기를 시작하자 조금씩 늘던 시청자 수가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내가 방송을 진행하며 처음 보는 흐름이었다. 시청자들은 배우로서의 그를 좋아했을 뿐 난민을 이야기하는 그는 반갑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방송을 어렵게 준비해온 내게도 시청자의 이탈은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황의 핵심은 따로 있었다. 정우성은 사람들이 떠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유명세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스타의 선행은 흔히 이미지를 밝히는 조명으로 소비되지만, 그는 자신이 아니면 열리지 않을 화면과 지면을 난민에게 내주었다. 유명인의 슬롯적 발언은 사람들이 듣지 않으려는 의제를 자기 인지도의 비용으로 들리게 할 때 의미를 갖는다. 알란 쿠르디의 죽은 몸이 세계로 하여금 난민 위기를 뒤늦게 보게 했다면, 정우성은 아직 살아 있는 그들의 사정을 미리 보게 하려 했다. 이미 유명한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 아직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옮겨놓는 일이었다.


‘17:1’은 주지하다시피, 정우성을 청춘의 아이콘으로 만든 영화 〈비트〉에서 나온 말이었다. 극 중 환규(임창정)가 열일곱 명을 혼자 상대했다고 허풍을 떠는 대사였지만, 이후 수적으로 고립된 승산 없는 싸움을 가리키는 관용구처럼 남았다. 그날 난민을 말하는 정우성 역시 다수의 혐오에 맞서는 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라도 합류해 17:2로 그와 함께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방송이 끝난 뒤 유엔난민기구를 꾸준히 후원해온 사람들의 규모와 영상에 남은 반응을 다시 확인하자 구도가 조금 달라졌다. 싫다는 목소리는 크고 집요했지만 단순한 수로 보면 ‘싫어요’보다 ‘좋아요’가 더 많았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채 후원하는 사람들도 이미 세계 최상위권의 규모를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17이고, 한 놈의 목소리만 유난히 큰 것인지도 몰랐다.


이 반전은 막연한 낙관보다 공론장의 착시를 드러낸다. 혐오는 말하는 데 드는 비용이 적고 침묵하는 연대는 좀처럼 숫자로 보이지 않는다. 반복되고 증폭되는 한 사람의 적대는 다수의 상식처럼 들리고, 조용히 후원하고 곁을 내주는 여러 사람의 선택은 하나의 여론으로 결집되지 않는다. 17:1이라는 구도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실제로 다수인가보다 누가 다수처럼 들리는가이다. 정우성은 그 소음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그의 버팀은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했다. 한 사람이 열일곱을 이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발언을 통해 보이지 않던 열일곱이 서로를 발견한 셈이었다.


그날 정우성이 이야기한 난민 문제는 결국 평화의 문제였다. 우리도 힘든데 왜 남을 도와야 하느냐는 질문은 고통을 순위 경쟁으로 만든다. 그러나 난민 보호는 한국인의 삶과 난민의 삶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국가가 자기 국민을 돌볼 바카라임과 박해를 피해 온 사람에게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할 바카라임은 서로를 취소하지 않는다. 약자를 밀어내야 내 몫이 생긴다는 믿음이 강해질수록 시민의 권리 역시 가난해진다. 권리를 혈통과 국적이 허락한 특권으로 만들면 그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까지 언젠가는 자신이 보호받을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정우성은 난민을 위해 좋은 말을 한 유명 배우가 아니다. 자신의 얼굴을 보러 온 사람들이 그 얼굴 뒤의 난민을 외면하는 순간에도 화제를 바꾸지 않은 사람이다. 그는 17:1의 영웅처럼 난민을 구해내지 못했다. 그보다 더 어렵고 덜 극적인 일을 했다. 난민을 공포의 집단에서 저마다 고향과 가족과 시간이 있는 사람으로 되돌려놓고, 우리가 그들에게 던진 의심을 사실의 자리로 가져왔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정우성이 있었지만 그가 하려던 일은 그 중심을 비우는 일이었다. 정우성을 보러 온 자리에서 난민을 보게 하는 것. 그날 그가 감당한 싸움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싸움은 2024년 7월 하나의 변곡점을 맞았다. 정우성은 아홉 해 동안 맡아온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이미지와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밀착돼 굳어지고, 난민을 위한 활동에 정치적 의도를 덧씌우는 공격이 계속되면서 자신과 기구 모두에게 좋지 않은 상황이 됐다는 것이 그가 밝힌 이유였다. 그는 지난 10년 동안 해마다 난민촌을 찾아가 난민을 이야기한 결과 한국 슬롯에서 막연하기만 했던 난민의 형체와 이해가 조금은 분명해졌다고 돌아봤다. 친선대사직에서는 물러나지만 배우로 살아가면서 소수자를 비롯해 우리 슬롯가 함께 말해야 할 문제들을 계속 지켜보겠다는 뜻도 남겼다.


나는 그 사임을 17:1의 싸움에서 물러난 일로 읽지 않는다. 이듬해 유엔난민기구를 다시 만났을 때에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있는 난민에게는 기꺼이 돈을 보내면서 제주에 온 예멘인과 울산에 정착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곁을 내주지 못하는 우리의 모순이었다. 그럼에도 이만큼 성장한 대한민국이라면 이제는 고향을 잃은 사람들을 품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유명인의 얼굴이 기구 자체를 대신하기 시작했다면 그 얼굴을 거두는 것 또한 난민보다 자신이 더 크게 보이지 않게 하는 방식일 수 있다. 정우성은 친선대사라는 직함을 내려놓았지만, 그가 열어놓은 길과 그 길에서 서로를 발견한 사람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서는 물러났으나 우리가 17이라는 싸움에서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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