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받지 못한 청춘의 초상

〈화란〉, 어른은 많았지만 보호자는 없었다

byMinseung Kang

1997년, 나는 수원의 한 공립고등학교에 배정받았다. 서울의 주요 대학에 학생을 많이 보내는 학교였고, 학생들을 많이 때리는 학교이기도 했다. 어느 쉬는 시간, 친구와 우유팩을 공중에 차며 놀다가 그만 3층 창밖으로 떨어뜨렸다. 마침 아래에는 체육교사 K가 있었다. 나는 곧장 내려가 거듭 사과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큰 손으로 내 뺨을 때렸다. 아픔보다 창피함이 오래 남았다.


그 학교에는 학생들 사이의 폭력이 거의 없었다. 나는 훗날 교사들이 폭력을 사실상 독점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진학 실적은 좋았고 학교 안의 질서는 유지됐다. 그러나 그것이 학생이 보호받고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우유팩을 떨어뜨린 내 잘못과 그 잘못이 교사에게 내 얼굴을 때릴 권리까지 주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당시의 나는 둘을 나눠 생각할 언어가 없었다. 폭력이 일상이 되면 아이는 무엇이 부당한지 묻기 전에 그 질서에 적응하는 법부터 배운다.


〈화란〉을 보며 떠오른 것은 K의 손보다 그 질서였다. 물론 내가 다닌 학교와 연규(홍사빈)가 사는 세계의 폭력을 같은 크기로 놓을 수는 없다. 연규는 집에서 의붓아버지 정덕(유성주)에게 반복해서 맞고, 학교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며, 가난과 범죄가 이웃한 동네에서 하루를 버틴다. 두 세계에서 닮은 것은 폭력의 규모가 아니라 그것을 견디게 하는 문법이다. 참고, 적응하고, 쓸모를 증명하면 언젠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는 약속. 그 약속이 작동하는 동안 폭력은 문제라기보다 과정으로 취급된다.


그래서 〈화란〉을 ‘어른이 없는 세계’라고만 부르면 조금 부정확하다. 영화에는 어른이 많다. 정덕은 가족 안에 있고, 엄마는 연규 곁에 있으며, 학교는 학교대로 움직이고, 중범(김종수)은 조직의 질서를 관리한다. 치건(송중기)은 연규에게 손을 내민다. 모두 자기 자리에 있지만 누구도 아이를 지키는 일을 자기 바카라임으로 끝까지 떠맡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사라진 것은 어른이 아니라 보호다.


연규가 의붓여동생 하얀(김형서)과 맺는 관계만은 그나마 서로를 향해 있다. 두 아이는 폭력적인 집 안에서 서로를 지키려 한다. 그러나 아이 둘의 연대는 보호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두려움을 나눌 수는 있어도 두려움의 원인을 없앨 힘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서로를 붙드는 장면은 공동체에 아직 희망이 남았다는 증거라기보다, 어른이 져야 할 짐이 아이들에게 내려왔다는 증거에 가깝다. 〈화란〉의 동네에서 폭력은 구조 요청을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라 각자가 감당해야 할 일상으로 처리된다. 정덕의 폭력은 그 집의 사정이 되고, 연규의 곤궁은 그가 알아서 견뎌야 할 형편이 된다. 학교는 갈등을 다루지만 아이를 구하지 못하고, 동네는 폭력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일상을 계속한다. 이곳의 사람들은 연규의 고통을 발견하지 못한 것이 아니다. 너무 오래 보아 더는 반응하지 않는다.


그 틈으로 범죄조직이 들어온다. 조직은 연규를 보호하지 않는다. 대신 당장 이해할 수 있는 규칙과 돈, 소속을 준다. 합법적인 세계가 아이의 고통을 각자의 사정으로 미루는 동안, 불법의 세계는 적어도 즉시 답한다. 그 답이 착취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연규에게는 무반응보다 반응이 먼저다. 나쁜 질서가 무서운 까닭은 강해서만이 아니다. 좋은 질서가 비워둔 자리를 빠르게 차지하기 때문이다.


치건은 그 질서 안에서 유일하게 연규의 물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그의 연민은 거짓이 아니다. 그는 연규에게서 과거의 자신을 보고, 지금의 지옥에서는 꺼내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가 연규에게 건네는 것은 조직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그러나 그 방법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중범에게 평생을 바친 치건 자신이 여전히 필요할 때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이며, 이미 그 삶에 깊이 지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연규를 자신이 걸어온 길 위에 세운다. 한 아이를 한 명의 가해자에게서 떼어냈다는 사실만으로 어른의 소임을 다했다고 믿지만, 집의 폭력에서 조직의 폭력으로 자리를 옮겨주는 일은 보호가 될 수 없다. 보호는 아이에게 선택지를 돌려주는 일이지만 치건의 도움은 조직원이 되는 하나의 길만 남긴다. 그는 연규가 폭력의 규칙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대신 그 안에서 능숙하게 살아남는 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그의 진심은 끝내 보호가 아니라 포섭에 머문다. 치건은 연규를 미워해서 망가뜨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망가뜨린 생존법밖에는 건넬 것이 없는 사람이다. 폭력은 때리는 손으로만 이어지지 않는다. 다른 삶은 없다고 믿게 만드는 순간에도 세습된다.


이런 구조가 오래가는 데에는 노골적인 가해자만큼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의 침묵이 필요하다. 무리는 한 사람을 바깥에 세우는 대가로 나머지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그 안전한 안쪽에서 나오는 일은 대개 손해를 동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폭력에 찬성하지 않으면서도 질서에는 협조한다. 〈화란〉의 서늘함은 악한 몇 사람을 골라내는 데 있지 않다. 저마다 먹고살고, 맡은 일을 하고, 자기 관계를 지키는 동안 한 아이가 아무에게도 보호받지 못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


연규가 꿈꾸는 화란은 그래서 거창한 이상향이 아니다. 엄마와 함께 맞지 않고 평범하게 사는 곳이다. 한 아이에게 평범함이 바다 건너 먼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사는 세계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화란에 가기 위해 연규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마저 폭력의 세계가 제공한다. 이 영화에서 희망은 목적지에 있지 않다. 자신을 구해준다고 믿었던 길이 또 다른 지옥임을 알아보는 순간에 겨우 생긴다.


그렇다고 그 탈출을 소년의 훌륭한 성장으로만 부르고 싶지는 않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혼자 살아남았다는 결말을 성인의식으로 미화하면, 그를 지키지 않은 어른들은 자신의 실패를 아이의 성숙으로 바꿔 부를 수 있다. 연규가 끝내 치건의 방식을 거부한 것은 분명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선언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삶을 거절했다는 데 가까워 보인다. 영화의 희망이 서늘한 것은 그다음 길을 여전히 아이 혼자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연규의 사정은 범죄조직이라는 극단적인 설정 속에 놓여 있지만, 보호받지 못한 아이가 스스로 생존의 바카라임까지 떠안는 일은 우리 슬롯에서도 드물지 않다. 가정과 학교, 제도가 제때 개입하지 못한 뒤 우리는 아이가 혼자 버틴 시간을 ‘자립’이나 ‘일찍 철든 것’으로 부르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이가 빨리 어른이 된 이야기가 아니라,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아이에게 넘긴 이야기다.


오래전 학교에서 뺨을 맞은 뒤 내게 남은 감정은 분노보다 수치심이었다. 내가 잘못한 일은 분명했지만, 나를 때린 어른의 바카라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구분을 배우는 데에는 오래 걸렸다. 〈화란〉은 그 구분을 끝내 가르쳐주지 않는 세계에서 한 소년이 어떤 얼굴로 자라는지를 보여준다. 어른의 자격은 아이에게 살아남는 법을 빨리 가르치는 데 있지 않다. 아이가 아직 아이인 채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을 지켜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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