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득, 고학력일수록 도움 요청을 못 한다?
“나의 혼삶에 꼭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가요?”
이 질문에 대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답변은 “돈”. 반드시 결혼과 출산을 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라지면서, 청년들은 “자가(自家)와 자차(自車)”만 있으면 혼자서도 문제없이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자신 있게 비혼을 외치던 청년 1인 가구 세대가 어느덧 중년층으로 접어들고, 그중 일부는 경제력을 꾸준히 쌓아서 소위 ‘돈 있는 혼삶’이 되었다. 돈 걱정 없는 1인 가구로 살면 마냥 자유롭고 여유로울 줄 알았는데, 지금 그 세대가 느끼는 고독과 고립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흔히 1인 가구의 위기를 논할 때, 저소득 1인 가구는 위험하고, 고소득 1인 가구는 안정적일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된다. 경제적 여유가 곧 삶의 방어벽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마주한 혼삶과 최근의 연구 결과에서 드러나는 것은, 오히려 일정 수준 이상의 자산을 가진 고소득 1인 가구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관계와 돌봄의 사각지대’에 깊숙이 방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돈이 많을수록 외롭다는 말은 사실일까
미래에 닥쳐올 위험을 혼자 바카라임져야 하는 1인 가구는, 가족 부양의 의도를 우선순위로 두는 다인 가구와는 조금 다른 동기를 가지고 경제자본을 축적하려 하게 된다. 기껏 경제력에 목숨을 걸었더니, 정작 이후의 삶을 위협하는 진짜 리스크는 일상적인 생활역량과 신뢰할 만한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돈이 많을수록 ‘돈이 관계를 대체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착각에 빠지기도 쉽다는 점이다.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얻어야 할 삶의 온기와 정서적 결속을, 돈을 지불해 이용하는 유료 서비스로 해결하는 데 익숙하다. 시끌벅적하게 소주에 삼겹살 먹는 약속은 줄어들고, 조용한 혼술 바에서 위스키를 마시며 고독을 ‘취향’으로 살며시 포장하기도 한다.
경제적 성취에 집중하다 보니 생산적이지 않은 만남은 조금씩 줄이게 되고, 인간관계가 효율과 비즈니스 중심으로만 재편되기도 한다. 일상에서 필요한 각종 노동을 쉽게 외주화(Outsourcing)하면서 자연스럽게 ‘살림력이 퇴화’되고, 내 손으로 내 공간을 쓸고 닦으며 얻는 날것의 ‘삶을 장악하는 감각’이 서서히 마비된다는 점도 문제다.
디지털 기술과 자본이 일시적으로 차단되거나 갑자기 아픈 순간이 오면, 집안은 순식간에 쓰레기더미로 변하고, 밥 한 끼 스스로 차려 먹지 못하는 무력한 자신을 보게 된다. 경제적 혼삶력이 ‘돌봄 네트워크’를 완벽하게 대체하지 못하는 것을 실감할 때, 고소득 전문직이라는 타이틀이 번지르르하게만 느껴지고 자존감은 흔들린다.
‘돈 많은 혼삶’이 고연령으로 접어들면서, 자신이 평생 일궈놓은 것들을 무의미하게 느끼기도 한다. 다인 가구는 자녀 상속이나 가족 부양이라는 명확한 자산의 목적지가 있지만, 1인 가구는 "내가 죽으면 이 돈 다 어디로 가나? 무슨 소용이 있나?”라는 본질적인 회의감에 마주한다. 피땀 흘려 모은 경제자본이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의미를 흐리게 만든다.
고소득, 고학력일수록 도움 요청을 못 한다
거칠고 험한 이 슬롯에서 혼자 힘으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한 고소득 1인 가구는 “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한 사람”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외롭다거나, 우울하다거나, 당장 도움이 필요하다거나, 심지어 오늘 저녁 동네에서 함께 밥 먹을 사람이 없다는 사소한 사실을 주변에 인정하는 것 자체를 심각한 ‘인생의 실패’이자 낙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당장의 생활고를 겪는 취약계층은 오히려 제도적 시스템이나 이웃에게 비교적 쉽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슬롯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이들은 체면이라는 무거운 갑옷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입조차 열지 못한다. SNS에서도 주변 사람들의 화려한 성취와 소비를 목격하기 쉽기에, “나 빼고 다 행복해 보이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고독과 우울을 드러내는 것은 어색하다. 고립 상황을 일종의 약점으로서 인지하게 되면, 점점 더 그것을 감추기 위해 회피하고 침묵하게 되면서 고립의 웅덩이가 깊어진다. “그 사람은 알아서 잘 살겠거니”라는 주변의 선입견도, 고소득 1인 가구의 고립을 눈치채지 못하게 가리는 벽이 된다.
혹시 당신도, 외로움이 찾아오면 더 바쁘게 일하려고 하는가? 고학력 고소득 1인 가구는 대체로 지금까지의 삶을 성취로 증명해 온 사람들이기에, 혼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도 성취로 해결하려는 패턴을 보인다. 외로움이 밀려오면 인맥을 넓히는 대신 더 바쁘게 일을 벌이고, 인생이 허무해지면 사람을 만나는 대신 자격증 시험에 응시한다. 미래가 불안하면 주식과 부동산 투자 공부에 몰두하고, 주말 일정이 텅 비어 초조해지면 강박적으로 헬스장 운동 계획을 세운다. 관계의 문제를 자꾸만 개인의 생산성 문제로 끌어들인다.
여기에 ‘체면과 취향’이라는 감옥이 스스로의 사방을 가로막는다. 저소득층 중심의 동네 자치센터 프로그램이나 무료 동네 평상 모임에 섞이지 못하고 ‘격이 맞지 않는다’고 느낀다. 이들이 택하는 소셜 네트워킹인 골프 모임, 와인 크루, 프리미엄 유료 커뮤니티는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제자본과 감정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든다.
노후 준비의 진짜 의미
우리는 지금까지 노후 준비라는 단어를 ‘돈을 모으는 행위’로만 여겨왔다. 연금 계좌를 정비하고 노후 자금 단위를 계산하는 것이 정답이라 믿었다. 하지만 1인 가구 시대의 진짜 노후 준비는 경제자본의 증식보다도 ‘슬롯자본의 재투자’로 패러다임을 바꿔보면 어떨까.
“내가 아플 때 망설임 없이 전화해 도움을 청할 사람은 몇 명인가.”
“갑작스러운 위기 상황에 내 집 비밀번호를 믿고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한 달 동안 내가 세상에서 연락이 안 돼도, 이상함을 느끼고 나를 찾아와 줄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가.”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은 통장 잔고의 숫자를 늘리는 일만이 아니다. 내 삶에 지워지지 않을 진짜 ‘사람’을 남기는 일이다. 혈연으로 묶인 전통적 가족이 비어있는 대신, 가족의 역할을 세분화하여 대응할 수 있는 나만의 슬롯적 시스템을 구축해 두어야 한다. 서로의 안부를 조건 없이 묻고 위급 상황에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는 ‘유사가족’으로서의 느슨한 슬롯자본과 연대를 갖는 것이, 경제력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풍요로운 혼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