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우리 집에는 당연히(!) 에어컨이 없었다.
이웃 친구 집에도 없어서, 친구집에 놀러가 더위를 해결할 수도 없었다.
여름이 되면 엄마는 작은 대야 두 개를 가져와 물을 받아 주셨다.
"발 담그고 있으면 시원해."
처음엔 시큰둥하게 발을 넣었다가 금세 놀이가 시작됐다. 물에 뜨는 장난감을 하나씩 가져와 배를 띄우고, 손도 넣었다가 발도 첨벙거리다가, 결국 작은 대야는 우리 남매만의 바다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작은 대야 하나씩으로 여름을 나게 한 엄마도 대단했고, 대야도 대단했다. ㅎㅎ 그 대야는 에어컨보다 더 쉽게 여름을 나게 하는 마법의 냉방기기였다.
선풍기도 하나뿐이었다.
열대야가 찾아오는 밤이면 온 가족이 거실에 이불을 펴고 잤다. 선풍기는 아마 회전으로 틀어 놓았을 것이다. 바람이 내 쪽으로 올 때는 천국, 지나가면 다시 현실이었겠지. 그 몇 초를 기다리던 마음까지도 여름의 풍경이었다.
20년 전, 한여름에 아이를 낳았다.
병원에서 이틀 있다 집에 왔는데, 정말 숨이 막힐 만큼 더웠다.
혼자 있어도 더운 계절인데 갓난아기와 거의 한 몸처럼 붙어 있으니 체감온도는 몇 도쯤 더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이도 땀을 흘리고, 나도 땀을 흘렸다. 무엇보다도 출산하면서 꿰맨 상처가 낫지 않고 덧나고 있었다.
보다 못한 남편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곧 에어컨이 도착했다. 여름에는 주문해도 한참 기다려야 하는데, 급하니 전시품을 샀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 집에도 에어컨이 생겼다. 아마 우리 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전제품 입주식이었을 것이다.
아이도 에어컨이 자기와 나이가 같다는 걸 안다. 아이 생일 즈음이면 늘 에어컨 입주 일화(?)를 얘기하며 웃었으니까. ㅎㅎ
그리고 올해,
20년 동안 묵묵히 일하던 에어컨이 결국 은퇴를 선언했다. AS 기사님은 뚜껑을 열어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부식이 되어 수리해도 성능을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기계도 스무 해를 버티면 할 만큼 한 거겠지. 우리는 오래된 에어컨에 작별을 고하고 곧 새 에어컨을 들였다.
최근에 우리 가족들은 에어컨 사용 규칙을 하나 정했다.
가족들이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 나오는 사연을 듣고는 빵 터져서 웃다가 그날부터 우리집에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그 규칙은 에어컨은 최소 두 명 이상, 복수의 사람이 있을 때만 켤 수 있다는 것.
혼자 있으면 선풍기를 틀고, 냉동실에 보관해 둔 냉매 얼음을 꺼내 안아 들고 지낸다. 혼자 있으면 우리는 에어컨을 켜기 위해서라도 다른 가족의 귀가를 기다린다. 매일 하는 귀가가 환영받는 일이 되었다. 드디어 에어컨을 켤 수 있으니까. ㅎㅎㅎ
하지만 온 가족이 함께 있는 주말이라고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 놓지는 않는다.
식구들이 모두 모여 밥을 먹을 때,
청소를 하거나 집안일을 할 때,
최고조로 더운 시간대에,
그럴 때 켠다.
물론 누군가는 "그냥 편하게 살면 되지" 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맞는 말이다. 새 에어컨도 있는데 괜히 고생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나는 여름이 더운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더워서 여름이다.
오히려 몸이 계절을 기억한다.
등줄기로 흐르는 땀도.
선풍기 바람을 기다리는 시간도.
얼음 한 조각의 고마움도.
몸은 아주 작은 불편들을 기억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것 같다.
ㄹ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 마음의 불편도 조금은 더 견디지 않을까.
더운 날 가족들의 한 마디에 화가 나는 순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속도나 마음이 맞지 않는 순간,
내 계획이 틀어지는 순간,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그런 불편들은 에어컨 버튼 하나로 금세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그 안에서 조금 버티고, 조금 기다리고, 조금 조율하는 힘이 필요하다.
협업도 그렇다.
좋은 협업은 의견이 같은 사람끼리 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불편을 견디며 함께 가는 일이다.
그래서 협업 능력은 어쩌면 '참을성'보다 '불편함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능력'에 더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도 더우면 에어컨부터 찾는다.
하지만 가끔은 리모컨을 손에 쥐고도 창문을 먼저 열어 본다.
선풍기를 먼저 틀어 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제 조금 괜찮네.'
몸이 조금 견디며 더위에 적응하는 동안
마음도 아주 조금씩 근육을 키우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에어컨을 참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불편을 살아 보는 연습을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를 단단하게 만든 것은 언제나 완벽하게 시원했던 날들이 아니라,
조금 덥지만 함께 웃었던 여름이었을지도 모른다.
표지 이미지> 제미나이 생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