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검증되지 않은 사업에 숫자를 요구하는 방식에 대하여
아직 아무것도 안 해봤다
계획을 잘 세우는 것과 사업을 시작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사업계획서를 쓰다 보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업을 꽤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누가 살 것인지.
얼마에 팔 것인지.
원가는 얼마인지.
몇 개를 팔 것인지.
1년 뒤 매출은 얼마가 될 것인지.
처음에는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사업을 하겠다는 사람이니 이 정도는 생각해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업계획서를 계속 고치다 보니 조금 이상한 지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예비창업가였다.
제품도 계속 만들어보는 중이었고,
가격도 검증하는 단계였다.
그런데 문서 안에서는 이미 몇 년째 사업을 운영한 사람처럼 대답해야 했다.
한 번은 담당자가 원가를 물었다.
제품 하나를 만드는 데 얼마가 들어가는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의외로 단순했다.
'그런데 이걸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지?'
원가에는 단순히 재료비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떤 재료를 쓰는지,
어디에서 가져오는지,
어떤 방식으로 제작하는지에 따라 숫자는 달라진다.
판매가격과 원가를 함께 놓으면 대략적인 마진 구조도 보인다.
사업을 시작하는 입장에서는 꽤 중요한 정보다.
지원받기 위해 사업성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이해했다.
사업비가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사업을 설명하는 것과
사업의 내부 숫자를 어디까지 공개해야 하는지는
조금 다른 문제처럼 느껴졌다.
더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예비창업가에게 바라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
시장조사를 해야 한다.
고객을 정의해야 한다.
경쟁사를 분석해야 한다.
가격을 정해야 한다.
원가를 계산해야 한다.
수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매출을 예상해야 한다.
마케팅 계획도 있어야 한다.
사업비 사용계획도 구체적이어야 한다.
성장 가능성도 설명해야 한다.
하나씩 놓고 보면 이상한 요구는 아니다.
문제는 이 모든 질문의 대상이 아직 사업을 시작하기 전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매출이 없어서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매출 계획을 묻는다.
제품을 검증하기 위해 지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검증된 것에 가까운 근거를 요구한다.
아직 시장에 내놓지 않은 제품의 판매량과 원가와 수익률까지 숫자로 적어야 한다.
여기에는 묘한 모순이 있었다.
물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돈을 줄 수는 없다.
지원금을 사용하는 만큼 최소한의 검토와 계획은 필요하다.
반대로 모든 숫자가 이미 검증됐고,
고객도 확보했고,
매출도 안정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여전히 ‘예비창업가’라고 부를 수 있는지도 애매하다.
아직 해보지 않았지만, 이미 해본 사람처럼 설명해야 하는 위치.
그래서 사업계획서를 오래 쓰면 묘한 착각이 생긴다.
표가 채워진다.
숫자가 생긴다.
시장 규모가 나오고 예상 매출이 계산된다.
월별 실행계획까지 만들어진다.
문서만 보면 사업은 이미 상당히 진행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서를 닫으면 현실은 다르다.
아직 고객은 계산표 안에 있다.
매출도 엑셀 안에 있다.
원가 역시 몇 번의 제작과 판매를 거치면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계획은 점점 완벽해지는데,
사업은 여전히 시작점에 있었다.
그때부터 사업계획서에 적는 숫자를 조금 다르게 보기 시작했다.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예상 매출도,
판매량도,
원가도,
아직은 확인해야 할 숫자였다.
틀릴 수 있다는 전제로 세워놓은 가설에 가까웠다.
어쩌면 예비창업가에게 정말 필요한 능력도 처음부터 모든 숫자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모르는 것을 구체적으로 찾아내고,
직접 팔아보고,
틀린 숫자를 고치면서,
조금씩 자기 사업의 숫자를 알아가는 것.
사업계획서는 미래를 맞히는 문서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아직 모르는 것들을 아는 척하는 문서가 아니라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지 찾아내는 문서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