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잃은 것이 아니라, 감정을 지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이른 나이인데, 오늘 친구의 부고를 들었다.
학창 시절 사고로 세상을 떠난 친구 이후, 처음 듣는 또 다른 친구의 죽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소식을 듣는 순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슬픔도, 눈물도, 먹먹함도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속에는 다른 질문만 계속 떠올랐다.
'나는 왜 아무렇지 않을까?'
'친구가 세상을 떠났는데 왜 슬프지 않을까?'
'내가 너무 무뎌진 걸까?'
소식을 전해준 친구는 두 달 전에 부고를 들었고, 그동안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도 나는 울지 않았다.
그 사실이 친구의 죽음보다 더 나를 슬프게 했다.
하늘로 떠난 친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한 친구였다.
중학교 시절에는 소녀 감성 가득한 절교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학교가 끝나면 이야기를 더 하고 싶어서 내가 친구 집까지 데려다주면 친구는 다시 우리 집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결국 밤이 깊어서야 서로의 집 중간쯤에서 헤어지던 친구였다.
성인이 되어서는 함께 술을 마시며 밤새 울고 웃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였다.
가끔 그 친구와 함께 뛰놀던 동네를 지나면 아직도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런 친구의 죽음 앞에서 나는 왜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을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서였을까
다른 친구를 통해 소식을 들어서였을까.
아니면...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울지 않았다.
최근 심리학에서는 이를 정서적 해리나 감정적 마비라는 방어기제로 설명하기도 한다.
뇌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는 충격을 경험하면, 감정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감정의 스위치를 잠시 내려 버린다는 것이다.
한 번 강하게 작동한 이 방어는 이후에도 비슷한 충격을 마주하면 감정이 올라오기 전에 먼저 마음을 보호하려고 한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문득 생각했다.
혹시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던 그날.
의사가 가족을 모두 부르라고 했던 그 절망의 시간이 아직도 내 안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 뇌는 또다시 나를 지키기 위해 슬픔의 문을 닫아 버린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나는 감정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슬픔 앞에서는 함께 슬퍼할 줄 알고,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는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언젠가 학창 시절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학교 다닐 때 너는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울고 웃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그 감성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
그때도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친구의 부고는 그 말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감정을 잃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너무 큰 상처를 지나오느라 잠시 감정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오늘 마음이 아픈 이유는 친구의 죽음만이 아니다.
슬픔조차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지금의 내 모습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아마 이 질문은 며칠 동안, 아니 조금 더 오래 내 안에 머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