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120 (최종회)
112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는 시인이 있다. 1996년 여성 시인으로서는 세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시인. 『끝과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된 그녀의 시선집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외국 시집 중 하나다. 아홉 해 전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시인의 시선집에서 「첫눈에 반한 사랑」이라는 시를 읽었다. 그 시를 읽고 나서 나는 단숨에 그녀의 모든 시가 좋아졌다.
갑작스러운 열정이 둘을 맺어주었다고
두 남녀는 확신한다.
그런 확신은 분명 아름답지만,
불신은 더욱더 아름다운 법이다.
예전에 서로를 알지 못했으므로
그들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래전에 스쳐 지날 수도 있었던
그때 그 거리나 계단, 복도는 어쩌란 말인가?
그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으냐고—
언젠가 회전문에서
마주쳤던 순간을?
(……)
나는 연인과의 첫 데이트 때 이 시를 편지지에 옮겨 적어 선물로 줬다. 그때는 우리가 아직 연인이 되기 전이었다. 데이트를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온 연인은 내가 필사해 준 이 시를 뒤늦게 읽고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을까?
비록 서로를 처음부터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오래전 수많은 거리와 계단, 캄캄한 복도를 스쳐 지나… 우리는 드디어 만난 것이다.
113
동민고등학교 2차 시험이 끝나고 이틀 뒤 일요일 오전, 연인과 모처럼 서울로 바람을 쐬러 갔다. 겨울이 끝나지 않아 여전히 공기는 차고 시렸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편안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시험에 대한 부담이 제법 컸던 것 같다.
덕수궁을 잠시 둘러본 후, 우리는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들렀다. 함께 문학 서가를 둘러보던 중에 연인이 말했다. 그녀는 검은 대지 위로 초록색 밤하늘이 그려진 표지의 『끝과 시작』이란 시집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거 우리 처음 만날 때 자기가 편지에 써준 시인 시집 아냐?”
“맞아. 그 바카라 내 옥탑방에도 있어.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라는 폴란드 시인이야.”
오 년 전 겨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인이 여든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를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마치 내 오랜 그리움을 잃은 듯 마음이 아팠다.
그로부터 이 년 뒤, 시인의 시를 통해 나는 지금의 연인과 이어졌다. 나는 세상을 떠난 그 폴란드 노시인이 시로써 나와 연인을 깊이 맺어주었다고 생각한다.
연인을 만나고부터 나는 지난날과는 다른 인생길을 걸었다. 사랑에 대해 다시 배웠고, 남들과는 다른 결의 삶을 살기로 다짐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우리’를 위해 살고 싶은 마음이 생애 처음으로 들었다.
연인이 건네준 시집을 서점에서 오랜만에 다시 읽어보았다. 페이지를 들춰보다가 전에는 눈여겨보지 않던 한 편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인생이란…… 기다림
리허설을 생략한 공연.
사이즈 없는 몸.
사고(思考)가 거세된 머리.
내가 연기하고 있는 이 배역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이 역할은 나만을 위한 것이며,
내 맘대로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무엇에 관한 연극인지는
막이 오르고, 무대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다.
(……)
114
월요일 우선고등학교 근무가 다시 시작됐다. 1·2학년 종업식 겸 봄방학은 수요일에 예정돼 있었다. 나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월요일 근무 내내 핸드폰만 바라봤다. 오늘따라 스팸 전화나 그 흔한 광고 메시지조차 오지 않았다.
115
화요일이 됐다. 종일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생활기록부 교차 점검뿐 아니라, 국어과 교사들과 새 학기 교과서도 분석했지만 잘 몰입이 되지 않았다. 어제에 이어 울리지 않는 핸드폰만 계속 바라봤다. 괜스레 한숨을 내쉬는 횟수도 잦아졌다.
“뭔 한숨을 그리 쉬나. 무슨 걱정 있어요?”
환경부장이 듣기 거슬렸는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 그냥. 이리저리 잡생각이 많아져서요.”
포털사이트에 들어가 오늘의 운세를 검색해 보았다.
운세의 총운은 ‘일단전진’입니다.
뜻하지 않은 오해를 받을 수 있는 날입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자신의 입장을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직설적으로 말하고 갈등의 소지는 빨리 푸는 것이 좋겠군요. 말하는 것이 두려워 상황을 피하려고만 한다면 그 오해는 영영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을 수 있습니다.
(……)
‘오해를 받는다고? 방금 환경부장과의 대화를 일컫는 건가.’
이주의 운세와 이달의 운세도 이어서 읽어봤다. 그중에서도 특히 취업운을 자세히 여러 번 읽었다.
취업에 대한 활동이 많아지는 시기입니다. 지금 당장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장기적인 포부와 안목을 가지고 취업을 추진해야 합니다.
딱 현재 상황에 대한 풀이 같았다. 이렇게 운세가 맞는다고? 문득 오늘의 운세 따위를 찾아보며 앞날을 점치는 내 모습이 딱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을 떨치려고 해도 자꾸 동민고등학교 생각이 났다. 금요일에 2차 시험을 봤으니 분명 그날 오후나 저녁까지는 최종 합격자가 가려지지 않았을까. 당일 바로 합격자에게 개인 연락을 주는 게 미뤄졌다면, 휴무일인 주말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월요일에는 연락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으니, 결국 난 불합격했다는 것일까.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가 없었다. 우선고등학교에서의 업무와 계획에 집중하는 게 현실적이었다. 아쉽지만 정교사 임용 기회는 언젠가 또 찾아올 것이다. 올해도 공립이든 사립이든 계속 임용시험에 도전할 테니까.
결국 예상대로 화요일에도 내 핸드폰은 연인의 연락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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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꾸었다. 푹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이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는 눕고 덮었던 내 이부자리뿐만 아니라, 셀 수 없이 많은 이불이 옆으로 나란히 펼쳐져 있었다.
‘대체 왜 이리 이불이 많은 거지?’
꿈에서 나는 그 이불들을 하나하나 깨끗이 빨고 건조했다. 그다음 이불들을 잘 접어 차곡차곡 장롱에 넣었다. 많은 이불을 집어넣었지만, 장롱 안 공간은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꿈에서 깼다.
깨고 나서 생각했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는 꿈은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걸 의미한다는데. 그런 해몽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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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식을 앞둔 수요일 오전, 3학년이 졸업한 이후로 나는 계속 공강이었다. 환경봉사부 교무실엔 나 외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교육과정부에서 준비해 준 새 학기 교과서를 읽으며 수업 연구를 하고 있었다.
글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십여 분 동안 계속 첫 문단만 읽고 있었다. 어젯밤에 꾸었던 꿈 생각이 자꾸 났다.
교과서를 덮고 창가로 다가갔다. 1학년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추운 줄도 모르고 종업일까지 축구공을 차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모습을 한참 바라보고 있자니, 학교란 참 멋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툴고 느리더라도 조금씩 성장해가는 학생들이 있고, 그들과 티격태격하면서도 결국엔 사랑으로 감싸주는 선생님들이 있다.
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다면…
그때 핸드폰 전화벨이 울렸다. 연인의 전화일까. 근무 중에는 보통 전화 대신 메시지를 보내는 연인인데. 핸드폰 화면을 보니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낯설면서도 왠지 낯익은 전화번호 같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강민 선생님. 동민고등학교 교감입니다.”
1차 합격 소식을 전해주던 그 전화 목소리와 똑같았다.
얼마나 통화가 이어졌을까.
통화를 마치고 나는 핸드폰을 바카라상에 내려놓은 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핸드폰 화면을 켠 채로 최근 통화 목록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리곤 방금 통화한 그 전화번호를 연락처에 저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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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저녁, 연인을 급히 만났다. 오후 늦게 동민고등학교 이사장실을 방문한 직후였다. 연인은 빨간색 스파크를 몰고 동민고등학교 앞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 심각한 표정 때문에 연인도 부러 내게 말을 걸지 않는 것 같았다.
“자기야.”
한참 만에 내가 연인을 불렀다.
“응?”
운전 중이었기에 연인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정면을 주시한 채 말했다.
“고마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제 시작이야.”
“뭐가?”
“그냥. 이 모든 것이.”
연인은 내 얘기를 듣다가 비상등을 켜고 도로 가장자리에 잠시 차를 정차했다. 동민고등학교 이사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내가 자세히 다 전하기도 전에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만난 이후, 그녀가 흘리는 두 번째 눈물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아름다운 글썽임이었을까.
짠하면서도 눈부신, 우리만의 익숙한 출발 신호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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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은 우선고등학교 마지막 출근일이었다. 우선고등학교는 매해 종업식 다음날 오후에 송별회를 겸한 식사 자리를 마련한다고 했다. 퇴직하는 정교사, 다른 학교로 이동하거나 계약이 끝난 기간제 교사들을 위한 자리였다.
‘선생님은 금방 될 줄 알았다.’라는 과분한 인사말과 축하를 받았다. 몇몇 기간제 교사에겐 ‘너무 부럽다.’라는 솔직한 말을 듣기도 했다. 모두에게 정말 고맙다고, 진심으로 우선고등학교에서의 일 년간 추억을 영영 잊지 못할 거라고 테이블을 옮겨 다니며 관리자를 포함한 선배·동료 교사들에게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했다.
삶의 인연이란 소중해서, 또 어딘가에서 이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더불어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우선고등학교 내 첫 제자들. 호준, 선우, 진우…… 그 외 많은 이름들.
그들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120
우선고등학교 마지막 출근을 마치고 돌아온 밤.
옥탑방 바카라상 앞에 앉아 탁상용 전등만 켜둔 채 2016년도 ‘교사생활기록부’라고 쓰인 작은 수첩을 가방에서 꺼냈다. 한 장 남은 마지막 페이지를 어떻게 채울까. 오늘의 짧은 일기나 지난 학기의 소회를 적으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바카라꽂이에 있는 시집들을 한참 동안 뒤적였다. 오래전 읽었던, 어떤 시 한 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망명과 투옥 생활을 반복하다 사후에 국적이 복원된, 튀르키예의 시인 ‘나짐 히크메트’의 시였다.
왜 그의 시가 떠올랐을까.
나는 그의 길지 않은 문장을 마지막으로 옮겨 적으며, 지난 일 년간 기록을 마무리했다. 그것은 먼 길을 돌아온 발걸음이면서 또 다른 시작, 아직 다가오지 않은 긴 여행을 위한 시였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전문
(끝)
* 이 소설은 2016년부터 2017년 2월까지가 배경으로 등장인물 및 학교명, 당시 사건들은 창작된 것으로 실제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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