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101
87
연인에게.
오전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어. 온몸에 힘이 빠지는 기분이었으니까. 열심히 준비한 경주를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달리고 달렸는데, 결국 아무런 함성도 듣지 못하고 관중이 모두 떠난 텅 빈 경기장에 홀로 들어온 꼴찌 마라토너 같았어.
이건 나의 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나도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 자동반사 같은 일시적 감정일 뿐이니까.
레이스를 끝마치긴 한 걸까. 어쩌면 남들보다 길고 긴 나만의 코스를 갖고 있어서, 내 마라톤은 여전히 진행 중인 거라고 생각해. 경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 달려야만 해. 나의 골인 지점은 남들보다 더 먼 곳에 숨어있을 테니까.
포기하지 않을 거야. 이제 난 과거의 내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아주 잠시만 미안해할게. 조금만 더 기다려줘.
연인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어젯밤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읽던 에세이집을 다시 펼쳤다. 그어놓은 밑줄을 찾아 그 문장을 수첩에 옮기는데, 곧바로 연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메시지를 읽자마자 바로 전화를 한 것이리라.
“괜찮아, 자기야. 난 조금도 실망 안 했으니까,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기분 괜찮지? 이제 시작이잖아. 난 세상에 자기만 한 선생님이 없다고 생각해.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 앞으로 만날 제자들을 위해서라도 계속 도전해 보자. 알았지?”
88
내심 기대하고 있던 우선고등학교는 2017년엔 국어 정교사를 선발하지 않았다. 새해 정교사로는 수학 교사 1명을 모집한다는 공지 사항을 뒤늦게 읽었을 때, 나는 어떤 마음이었나. 아쉬웠을까. 미련을 버릴 수 있었기에 다행이었나. 우선고등학교에서 보낸 지난 일 년이 한 편의 영화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2017년 1월, 나는 일단 우선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채용 시험에 재응시했다. 우선고등학교는 기간제 교사에 대한 자동 갱신은 없었고, 모든 기간제 교사 과목을 일 년 단위로 재모집했다. 지난해 근무했던 교사도 응시할 수 있었지만, 올해 지원자들과 동일하게 원서를 또 접수해야 했다.
비민주적인 학교 문화와 영어 기간제 C교사에 대한 대처 방식 등 우선고등학교에 실망감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우선고등학교에 재응시하는 게 기간제 교사직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일 년 전과 똑같이 서류를 통과했고, 면접과 수업 실연을 거쳤다. 면접장에서 마주한 장면은 지난해와 같았다. 우측에 교장, 좌측에 교감, 가운데 앉은 이사장의 모습. 다른 점이라면 이번에는 이사장의 아들인 교감이 질문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수업 실연을 시작하고 채 일 분이 지났을까. 교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모의수업을 중단시켰다.
“강민 선생님은 작년에 우리 학교에서 고3 국어까지 맡으셨는데, 우리가 수업을 더 평가할 건 없고요. 바로 면접으로 넘어가시죠. 분필 교탁에 두시고 여기 의자에 앉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교감은 내 서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바로 나를 바라보며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올해 또 우리 학교에 지원하신 이유가 뭐죠?”
나는 우선고등학교에서의 지난 일 년을 떠올리며 좋았던 점들을 솔직히 얘기했다. 더불어 학생들과의 토론 수업, 못해본 비교과 활동을 더 하고 싶다고 말했고, 비담임이었던 탓에 학생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쉬었다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올해는 꼭 담임교사를 하고 싶어서 우선고등학교에 다시 지원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 올해는 담임 맡으셔야겠네요."
교감이 웃으며 말했다. 작년 면접 때 처음 마주한 교감의 차가운 표정과 너무 달라서 놀랐고, 한편으론 재합격을 확신했기에 기뻤다.
89
다시 부천시립 상동도서관 열람실. 겨울방학도 겨우 열흘 정도가 남았다. 그때까지 남은 사립 정교사 임용시험은 단 하나였다.
공립 시험 이후로 두 차례 더 응시한 사립 정교사 시험 결과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우선고등학교에서 다시 일 년의 기간제 교사 자리를 확보했기 때문인지 공부할 때 불안하고 답답했던 마음은 많이 사라졌다. 여유를 갖고 공부를 하니 집중도 더 잘 되는 듯했다. 천천히 배움의 자세로 계속 도전한다는 마음이었다.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다는 걸 느꼈다. 전공 지식만이 아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만 하다 보니 삶에 대한, 세계에 대한 이해와 고민, 사색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다음 주 마지막으로 예정된 사립 정교사 임용시험을 준비하다가 문득 든 생각이었다.
열람실 창밖을 보니 짧은 겨울 해는 벌써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집에 가는 길, 오랜만에 기분 전환 삼아 서점에 잠시 들러야겠다고 생각했다.
90
부평지하상가에 있는 서점은 제법 큰 규모의 지역 서점이었다. 시집 코너를 서성이다가 모처럼 인문학 서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지 않아 눈에 띈 양장 표지의 자그마한 바카라이 있었다. 제목은 『공감필법(共感筆法)』. 표지 안쪽엔 ‘공부’의 뜻이 풀이돼 있었는데, 단순한 사전적 정의는 아닌 듯했다.
공부(工夫) 「명사」
1. 세상의 겉과 안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
2. 더불어 나의 바깥을 이해하는 일.
3. 타인과 함께 슬롯를 고민하는 일.
4. 읽고 쓰고 말함으로써 참여하는 일.
1부터 4까지 적힌 공부를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나 스스로 점검해 보았다. 해당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4번에 제시된 ‘읽고 쓰고 말’하기만 그냥 조금 하는 정도랄까. 그것도 ‘참여’를 위한 ‘읽고 쓰고 말’하기가 아니었다. 내가 하는 건 당장의 안정된 원(圓)에 들어가기 위한 삶의 몸부림에 불과했다.
그 바카라은 필자가 강연했던 내용을 보충해서 쓴 강연록 원고였다. 그래서인지 문체가 쉽고 가벼워 읽기 편했다. 눈에 띈 한 문장.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슬롯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진정한 공부는 눈앞의 시험을 위한 것도, 안정된 체제로의 진입을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잠시 바카라을 덮고 내 공부에 대해 되돌아보았다. 문득 지난 일상에서의 실패와 실망, 사소한 성공들이 아주 작게 느껴졌다.
91
지난밤 흰 눈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건 그 눈이 이번 겨울 들어 참으로 드물고 오랜만에 내렸기 때문이다. 첫눈 이후 눈다운 눈은 처음이었다. 희소한 것은 그만큼 아름답고 가치있다고 여기면서도, 그것들이 너무 잦고 익숙해지면 또 금세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다.
나는 수첩을 펴고 또 오늘의 생각을 적었다.
그들이 아름다움을 잃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잊는 것.
만남이 그랬고 사랑이 그랬다. 첫 학교와 첫 수업, 첫 제자들도.
92
공립뿐 아니라 그동안 경험한 사립학교 임용시험 시간은 모두 오전이었다. 그러나 이번 겨울 마지막으로 응시한 동민(東民)고등학교 1차 필기시험은 특이하게도 토요일 오후 3시였다. 덕분에 아침부터 여유롭게 움직이며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연인은 내가 이미 우선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자리를 확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올해 마지막 정교사 시험만큼은 정말 경험 삼아 본다는 마음으로 즐기자고 했다. 내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더 그렇게 말한 것이리라.
우리는 정말 그랬다. 시험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데이트하듯 팔짱을 낀 채 여유롭게 시험 장소인 학교를 찾아가 겨울 운동장을 걸어도 보고, 근처 식당에서 평소 좋아하는 파스타와 샐러드로 점심을 먹기도 했다.
“시험 보는 날, 이렇게 맘 편히 여유 부려보는 건 또 처음이네.”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오히려 이러다 붙는 거 아냐?”
“그럼 더 좋은 거고.”
“하하.”
기간제 교사 인터넷 카페와 예비 국어 교사를 위한 온라인 게시판을 통해 동민고등학교 정보를 좀 알아봤다. 작년에는 동민고등학교에서 이삼 년 근무한 기존 기간제 교사가 국어 정교사 시험에도 응시해 합격했다고 한다. 그러면 올해도 비슷한 흐름일까. 이번에도 괜히 들러리 역할만 하게 되는 건 아닐지. 점심식사 후 카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연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줬다.
“그러면 좀 어때? 그래도 시험장 분위기나 사립시험 문제 유형 같은 거 익힐 수 있잖아.”
“그건 그래.”
“근데 작년에도 국어 뽑았다면서, 올해 또 국어 교사를 선발하는 거야?”
“그러게. 학교에 국어 교사가 부족한가. 이번에는 국어랑 슬롯 과목 한 명씩 뽑더라고.”
채용공고엔 1차 필기시험은 전공 90퍼센트, 교양 10퍼센트 비율로 문제가 출제된다고 안내돼 있었다. 교양에서는 한자 문제가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 연인과 카페에서 사자성어 퀴즈를 내며 여유롭게 커피를 마셨다.
시험 시작이 한 시간 앞으로 다가왔을 때,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연인이 말했다.
“정말 안 기다려줘도 돼?”
“시험 볼 때마다 기다리면, 앞으로 자기 수십 번 기다리게 될지도 몰라.”
연인이 탈 62번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 나와 보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래도 수십 번은 곤란해.”
“그래. 알았으니 마음 편히 집에 가세요. 잘 보고 갈게.”
버스에 탑승한 연인이 차창을 열고 웃으며 외쳤다.
“너무 잘 보려 하지 말고, 즐겁게 보다 와!”
“그럴게. 걱정 마!”
93
수험번호는 접수 순서로 부여됐을까. 비교적 일찍 응시원서를 냈던 내 수험번호는 2번이었다. 시험장은 수험생 100명은 족히 들어갈 만한 대강의실이었다. 좌석마다 손바닥 길이만 한 높이로 낮은 칸막이가 설치돼 있었는데, 평소에는 학생들의 자습실로 사용하는 장소 같았다.
시험이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인지 수험생들은 아직 다 오지 않았다. 나는 긴장하지 않기 위해 부러 여유를 갖고 돌아다니며 좌석마다 붙어 있는 수험번호 스티커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뒷자리 마지막 번호가 97번이었다. 그렇다면 국어 정교사 한 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총 아흔일곱 명이 응시했다는 말인가. 이번 겨울 마지막 사립 정교사 임용시험이기도 했고, 동민고등학교가 공립 필기시험 결과 발표 이후에 원서 접수를 시작했기 때문인지 경쟁률이 지나치게 높아진 것 같았다.
그래도 시험에 응시한 예비 교사가 무려 아흔일곱 명이라니. 학교가 요구하는 단 한 명의 정교사가 선발되고 나면, 합격하지 못한 나머지 아흔여섯 명은 모두 어떻게 되는 걸까. 그들은 다른 학교 기간제 교사로 가거나, 노량진 학원가를 전전하며 또 일 년간의 수험 생활을 견뎌야 할 것이다.
현질적으로 나 역시 나머지 96이라는 숫자에 포함될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래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우선고등학교 기간제 교사 자리는 이미 확보해 두었으니까. 올해도 내 교사 생활은 계속될 테니까.
94
“1차 필기시험은 오후 세 시부터 네 시까지 60분 동안 진행됩니다. 채점과 서류 검토가 완료되면 며칠 내로 1차 합격자 상위 10등까지 개별 연락을 드릴 겁니다. 자, 시작합니다. 최선을 다해 주세요.”
감독 교사는 총 두 명이었다. 동민고등학교 부장 교사로 보이는 연배 지긋한 교사가 한 명, 나머지 한 명은 젊은 여교사였다. 저들은 무슨 과목을 가르칠까. 시험장 가장 앞자리에서 그들을 관찰하다가 괜한 궁금증이 생겼다.
시험 문제는 전공 35문항, 교양 5문항으로 총 40문항이었다. 전공에서는 서술형 문항이 네 문제 포함돼 있었고, 교양도 마지막 문항은 한자로 답을 쓰는 주관식 문제였다. 부담을 내려놓고 여유롭게 시험지를 읽어 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이전에 본 시험들보다 문제의 정답이 잘 보였다. 평소 자신 있었던 문학과 문법 영역은 물론이고, 비문학 지문들도 술술 읽히는 기분이었다. 틈틈이 익혀둔 한문 실력 덕도 봤다. 선지가 아예 한자로만 구성된 문항도 있었으니까. ‘동민고등학교 관리자나 국어 교사들은 모두 한자를 좋아하는 건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립학교 임용시험에서는 보통 시간이 모자랐는데, 이번에는 40문항을 다 풀고 나서도 주어진 한 시간에서 오 분 가량이 남았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기 위해 선택형 문항의 답안지 마킹을 검토하고, 서술형 답안에서 틀린 글자는 없는지 마지막까지 점검했다.
느낌이 좋았다.
혹시 결과도…?
하지만 경쟁률이 97대 1이라니. 시험을 치르고 나처럼 좋은 기분을 느낀 사람은 물론, 실제 성적까지 좋은 사람도 최소 이삼십 명은 되지 않을까. 그리고 다시 그중에서 오직 단 한 명만이 정교사로 선발된다.
일찌감치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마음이 편했다. 부족함 없이 문제를 풀었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후회 없이 주어진 기회를 맞이하다 보면 언젠가 내게도 하늘의 운이 깃들 것이다.
95
2017년 2월 1일.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다시 우선고등학교로 출근했다. 봄방학 전이라 2016학년도 학사 일정이 모두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고3들은 이틀 뒤 금요일 졸업식을 앞두고 있었고, 고3보다 여름방학이 길었던 1·2학년의 종업식은 졸업식이 끝난 다음 주였다.
어쨌든 새해에도 우선고등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졸업을 앞둔 호준이와는 이별이지만, 1학년이었던 선우, 진우와의 인연은 계속된다. 담임교사를 맡게 되면 분리수거장 업무는 다른 교사에게 넘기게 될까. 덥고 추운 날엔 좀 고생했지만, 실외에서 바람을 쐬며 복잡한 머리를 비울 수 있어서 나름대로 괜찮았는데. 선우가 새해엔 자율 동아리를 맡아달라고 했는데, 정규 동아리는 현대문학감상반을 그대로 유지해야 할까.
이미 전학년도 생활기록부 작성을 끝낸 나는 이런저런 신학년도 계획으로 조금씩 마음이 설렜다. 감사한 일이었다. 비록 또 일 년짜리 기간제 교사라는 불안정한 자리일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학생들 곁에서 일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 뛰노는 교정에서 함께 봄 햇살 가득한 푸른 하늘을 다시 볼 수 있으니까.
96
고3 졸업식을 마친 후 다음날 토요일 오전, 옥탑방 근처 카페에 나와 모처럼 시집을 읽고 있었다. 어제 퇴근길에 또 서점 시집 코너를 서성이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 구입한 시집이었다. P. B. 셸리의 『시인의 꿈』이라는 시집. 「종달새에게」라는 긴 시를 읽으며 인상 깊은 구절에 막 밑줄을 긋던 참이었다.
우리는 앞뒤를 바라보며
지금 없는 것을 그리워하는 법
진심의 웃음에도
어떤 괴로움은 차 있고
가장 감미로운 노래는 가장 슬픈 생각을 전하는 노래.
그때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왔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모르는 번호로부터 온 전화였다.
“여보세요.”
“강민 선생님이시죠?”
“네, 맞습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동민고등학교 1차 필기시험에 합격하셨어요.”
“네?”
“모집공고대로 1차 합격자 열 분을 대상으로 2차 면접시험과 수업 실연이 진행됩니다. 다음 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예정돼 있습니다.”
“제가 1차에 합격했다고요?”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렇다면 97명의 응시생 중 10등 안에 들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면접과 수업 실연 잘 준비하셔서 좋은 결과 있길 바라겠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에 뵙겠습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경쟁률이 10대 1로 줄어든 셈이다. 여전히 높은 경쟁률이고, 최종 합격의 확신은 없었지만 기뻤다. 노력의 보상을 조금은 받은 것 같아서. 그리고 다소 회의가 들던 내 전공 지식과 실력에 얼마만큼 확신을 주어서. 연이은 실패로 인해 낮아진 자존감이 다소나마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97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처음의 들뜬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연인에게도 소식을 알린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는 오히려 더 차분해지는 기분.
왜일까.
98
현실적으로 생각할수록 내가 동민고등학교에 최종 합격할 확률은 거의 없어 보였다. 지난해에도 그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기간제 교사가 합격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올해도 그렇지 않을까.
국어 정교사 한 명을 모집한다는 건 현재도 근무하고 있는 기간제 국어 교사가 최소한 한 명은 있다는 뜻이다. 물론 기존 정교사가 퇴직하여 발생한 결원일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동민고등학교 기간제 국어 교사도 당연히 그 학교 정교사 임용시험에 응시했을 거고, 아마 1차 필기시험도 합격했으리라. 그렇다면 2차 면접과 수업 실연에 내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한들 허무한 들러리가 되는 건 뻔한 사실이다. 또 2차 시험일인 금요일은 우선고등학교의 출근일인데, 오후 근무를 빠지고 동민고등학교 시험을 제대로 보러 갈 수 있을까.
연인에게 이런 생각을 전했더니 그녀는 정색하며 반문했다.
“무슨 말이야?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시험 보는 사람이 97명이나 됐다며. 거기서 10등 안에 드는 게 쉬워? 최종 합격 여부를 떠나, 무조건 보러 가야지.”
“그런가? 근데 이미 우선고등학교에서 새 학년도 담임교사를 맡기로 했는데…”
“거긴 기간제 교사 자리잖아. 여긴 정교사 자리고.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그래도 작년에 날 채용해 준 우선고와의 약속이고, 또 평일에 2차 시험 보려면 근무를 빠지고 조퇴해야 하는데…”
연인이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약간 높였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게 중요해, 지금?”
“들어봐. 작년에도 거기 동민고등학교 근무하던 기간제 교사가 최종 합격했대. 올해도 비슷할 거야. 따로 내정자가 있지 않을까?”
“그걸 왜 자기가 미리 판단해? 자기는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기다려야지. 이런 기회가 흔한 게 아니잖아. 주어진 일을 다해놓고 그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거지.”
연인이 계속 설득해도 나는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올해에도 날 뽑아준 우선고등학교의 교감과 교장, 보이지 않게 신경 써준 몇몇 선배 교사들, 그리고 자율 동아리를 맡아달라는 선우가 머릿속에 자꾸 떠올랐다.
99
월요일에 출근했지만 종업식을 앞둔 우선고등학교 분위기는 여유로웠다. 내가 과목을 담당한 고3 학생들이 졸업했기에 따로 준비할 수업도 없었다. 일 년간 맡았던 저축 업무 파일을 최종적으로 정리해 결재를 올리고, 중간에 바람도 쐴 겸 분리수거장에 나가서 청소를 했다. 겨울방학을 끝내고 3학년 졸업식까지 마치고 나니 분리수거장에도 딱히 할 일이 많지 않았다.
몸을 녹이기 위해 다시 교무실로 들어갔을 때 영어 교사 H가 말했다.
“강민 쌤, 교장 선생님이 찾으세요.”
체육대회 축구 시합과 수능시험 때 식사 자리를 제외하고는 교장과 특별히 대화를 나눈 적은 없었다. 나를 따로 부른 경우는 이제껏 한 번도 없었는데. 무슨 일일까.
100
교장실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교장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교장 선생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교사들 것보다 두 배는 더 넓어 보이는 바카라상 앞에 앉아 교장은 컴퓨터 화면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노크와 인사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걸까. 문을 열고 들어온 나는 30초 정도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뒤늦게 나를 본 교장이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강민 선생님. 거기 잠시 편하게 앉으세요.”
교장은 응접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 마실 것 좀 줄까요? 강민 선생님은 뭐 좋아하시나. 커피? 녹차?”
교장이 내가 마실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다소 불편할 듯했다.
“괜찮습니다. 방금 마시고 왔습니다.”
교장은 냉장고에서 비타500 음료수 한 병을 꺼내 내게 건넸다.
“그러면 대신 이거라도 마셔요. 이따가 드셔도 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아, 다른 건 아니고. 내가 궁금한 게 있어서요.”
101
“강민 선생님, 동민고등학교 시험 봤어요?”
교장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런 내 감정이 표정에 드러났을까.
“내가 알고 있어서 놀랐습니까? 선생님, 생각보다 인천 좁아요.”
동민고등학교 정교사 시험에 응시한 것을 교장이 어떻게 알았을까. 딱히 비밀도 아니지만 올해 우선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를 다시 하기로 한 마당에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교장의 표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우선고등학교 교장으로선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우선고등학교와 달리 동민고등학교는 정교사 임용시험이니 충분히 이해할 만한 상황 아닐까.
나는 솔직히 답했다.
“네, 지난달 말에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알았냐고요? 아, 거기 교감이 전화해서 물어보더라고요. 2차 시험 대상자인 강민 선생님이 현재 우선고 재직 중이던데, 어떤 선생님이냐고.”
동민고등학교 교감이 우선고등학교 교장에게 전화해서 나에 관해 물어봤다니, 사립학교끼리 그런 네트워크가 있는지 미처 몰랐다.
“관리자들끼리 종종 연락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해요. 또 사립은 공립과 달리 오래 함께할 식구를 뽑는 처지니 그럴 말도 하지요. 걱정하지 말아요. 본 그대로 말해뒀으니까.”
본 그대로 전했다는 건 어떤 뜻일까.
“환경봉사부에서 궂은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하는 선생님이라고 말해뒀으니, 2차 시험도 잘 보고 와요.”
교장은 지금 날 응원하는 건가. 우선고등학교 교장이 왜 동민고등학교 시험을 보는 내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장 선생님, 저는 아직 그 학교 2차 시험을 볼지 말지 결정하지 못해서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교장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우선고에서 올해 담임을 맡기로 했고, 또 2차 시험일이 평일이라서 여기 근무를 빠지고 그곳 시험을 보러 가는 게 좀 그래서요.”
“정교사 자리잖아요. 당연히 보러 가야지. 강민 선생님은 고3 수업 담당이니까 이제 수업 교환도 필요 없잖아요. 애들 다 졸업했으니까.”
“아…”
“시험일이 언제예요?”
“이번 주 금요일 오후 2시입니다.”
“내가 교무랑 교감한테는 잘 말해둘 테니까 조퇴 써요. 이런 기회가 쉽게 오는 게 아니야.”
그 순간 나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뭔가 내가 모르는 힘이 꼭 2차 시험을 보러가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 같았다.
“나도 기간제 교장이라서 선생님들 마음 잘 알아요. 올해 계약기간 끝나면 나도 어찌 될지 모르거든. 그러니 선생님, 기회가 올 때는 무조건 최선을 다해야지요. 내가 강민 선생님이라면 당연히 시험 보러 갈 겁니다.”
교장은 굳이 안 해도 좋을 말까지 덧붙였다.
“내가 동민고등학교 학부모이기도 해요. 우리 아들이 거기 2학년에 다니고 있어요. 강민 선생님이 그 학교 선생님 되면 우리 아들 입장에서도 좋은 거지.”
그건 단순한 칭찬일까, 나를 응원하기 위한 격려였을까.
이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 전용 콘텐츠입니다.
작가의 명시적 동의 없이 저작물을 공유, 게재 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