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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의 봄. 30포인트 정도 크기의 숫자 ‘2016’이 고딕체로 새겨진 두꺼운 수첩을 받았다. 회색빛 커버 위 ‘2016’이라는 숫자 아래로는 더 작게『TEACHER’S DIARY』라는 영어 제목이, 수첩 하단부엔 ‘우선고등학교’라는 여섯 글자가 그보다 더 선명히 적혀 있었다. 이른바 ‘교무수첩’이라고 불리는 그것을 나는 서른네 살, 1년 차 기간제 교사가 되고서야 처음 받아보았다.
학교에 놓아두고 평소에는 휴대하지 말라는 것인지 수첩 속 바인더는 불필요하게 커 보였고, 두께와 비례하게 무게도 제법 나갔다. 그만큼이나 학교 업무도 엄청나게 많다는 것일까? 두꺼운 양장본 소설바카라만큼의 부피였기에 백팩 안에 넣고 다니다가는 가뜩이나 좁은 어깨가 더 굽어질 것 같았다. 다른 교사들은 이것을 다 유용하게 쓰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사람이 당장 내겐 보이지 않았다.
학교라는 온라인 게임에서 받은 첫 선물. 하지만 나는 과감히 그 크고 무겁기만 한 ‘선생님의 일기’를 교무실 바카라상 서랍 가장 안쪽에 봉인했다. 그리곤 곧바로 손바닥 크기의 새 수첩을 구매했다. 포켓북처럼 보이기도 하고 기자들의 작은 노트 같기도 한 수첩. 수첩 표지에 나는 ‘교무수첩’이라고 적으려다 말았다. 익숙한 말을 비틀어 낯선 이름이나 제목을 만드는 건 대학 시절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가져온 습관이었으니까. 나는 수첩 맨 위에 작고 진한 필기체의 일곱 글자를 또박또박 써넣었다.
‘교사생활기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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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애인, 연인.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서로를 부를 땐 그냥 ‘자기’라고 불렀다. 처음엔 다소 낯간지럽고 어색했지만 점점 익숙해졌다. 사랑하는 사람에겐 왜 ‘너’라는 이인칭보다 ‘자기’라는 말을 쓰는 걸까. 나 자신과 동일할 정도로 소중하다는 뜻일까.
그런 ‘자기’를 남들에게 말할 땐 뭐라고 해야 하나. ‘여자친구’라는 호칭이 제일 흔하지만 뭔가 우리 사이를 온전히 담아내기엔 다소 가볍게 느껴진다. ‘애인(愛人)’은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글자 뜻 자체는 좋지만, 결혼한 이들이 배우자 몰래 사귀는 이성을 부르는 말로도 들린다.(1996년도에 불륜 스토리를 아름답게 다룬 ‘애인’이란 드라마가 있기도 했다.)
남은 건 ‘연인(戀人)’이라는 말.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그리운 사람’ 정도가 될까? 내 연인은 ‘십 년 된 부부’보다 ‘십 년 된 연인’이라는 말이 더 멋지다고 했다. 실제로 우리 둘이 익숙한 부부가 아니라 생을 오래 나누는 연인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결혼이라는 슬롯적 제도에 매여 있는 관계보다는, 오랜 동안 서로를 마음으로 그리고 신뢰하는 사이가 되길 소망한다고.
나는 그 연인을 독서토론과 논술교육을 전문으로 하는 사교육 회사에 다닐 때 만났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인이 되려고 이 년 동안은 신문사 신춘문예와 문예지 신인상에 도전하고, 다시 이삼 년은 교사의 꿈을 위해 중등임용고시에 매달렸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를 맛보고 결국 마지못해 들어간 곳이 바로 그 회사였다.
그곳에서 연인과 만나 사귄 지 일 년 정도 되었을까. 내 청춘의 지난 여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그녀는 어느 날 내게 웃음기 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자기야, 이제 논술 교사 그만두고, 기간제 하면서 임용시험 다시 도전해 봐.”
연상의 연인은 그 교육 회사에 몸담은 지 당시 십 년이 되어갔고, 서른세 살의 나는 독서토론 논술 교사 2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기간제가 뭔데?”
“교사를 꿈꿨다는 사람이 기간제 교사도 몰라?”
“사범대 안 나와서 잘 몰라. 난 교직 이수 출신이야.”
“어휴, 이렇게 정보력이 없어서야. 교사 자격증 있는 젊은 사람이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연인은 교사가 꿈이었다는 내 지난 시절 얘기를 듣고서 처음에는 조심스러워했지만 나중에는 틈만 나면 재도전을 권유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자기가 그 나이였으면 벌써 중고등학교에 원서 넣고 기간제 교사하면서 계속 임용시험에 도전했을 거라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왜 벌써 꿈을 포기해? 더 먼 우리 미래를 봐.”
결국 그녀가 승리했다. 아니 그녀가 말한 ‘우리’가 마침내 나를 이겼다고나 할까. 혼자만을 위한 ‘나’로는 살 수 없었다. 이제 결코 ‘우리’를 포기할 순 없었으니까.
3
모든 걸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연인의 권유대로 교육 회사를 우선 그만뒀다. 그다음엔 옥탑방 바카라꽂이 하단 구석에 이 년간 묵혀둔 『우리말 문법론』, 『표준 중세국어문법론』, 『한국문학통사』 등의 두꺼운 전공 서적을 다시 바카라상 위에 꺼내놓았다.
임용시험 공부를 한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기댈 형편은 아니었기에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이번에는 정식 임용에 앞서 교사로서의 현장 경험을 쌓고자 했다. 그래서 일단 회원 수가 가장 많은 기간제 교사 인터넷 카페부터 서둘러 가입했다. 기간제 교사가 되면 호봉 산정에 경력이 포함될 뿐 아니라, 수업 실연과 면접 상황을 실제처럼 경험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점이 있었다. 전에는 왜 이런 걸 생각조차 못 했을까. 절실함이 부족했을까.
기간제 교사 채용 공고가 각 시도교육청 홈페이지에 올라온다는 것도 알게 됐다. 현재 거주지인 인천은 물론, 경기도와 서울의 교육청 홈페이지를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았다. 출퇴근이 가능한 거리라면 어느 지역 학교든 상관이 없었다. 인천만 지원하기엔 선택의 폭이 좁아 보였고, 서른 중반의 무경력 교사를 기간제로 바로 채용해 줄 학교가 내가 생각해도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기간제 교사 채용 단계는 1차가 서류 심사였고, 2차는 대개 수업 실연과 면접이었다. 일단 서류가 통과되어야만 함께 근무할 교장과 교감, 교사들 일부를 평가자로 대면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1차에 제출할 서류는 학교마다 달랐지만 일반적으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교원자격증 사본 정도였다. 경우에 따라선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와 대학교 성적증명서도 내야했고, 사립학교 중 일부는 중학교 생활기록부까지 요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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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근무의 한 학기 교사부터 1년 풀타임 기간제 교사 자리까지, 약 스무 군데 학교에 지원했다. 서류는 직접 방문해서 행정실에 제출하기도 했고, 우편이나 이메일로도 보냈다. 교직 경력도 없고 신입 교사치고는 나이도 많았기에 이곳저곳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서 중학교뿐 아니라 인문계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까지 가리지 않고 지원했다.
1차 서류 심사 발표가 다가올수록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합격 연락을 받을 수 있을까? 면접 볼 기회를 아무 데서도 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더 먼 지역의 학교에도 지원해야 할까? 혹시 서류가 도착하지 못한 건 아닐까하는 불안함에 우편 접수한 곳은 몇 번이나 등기 수령 여부를 인터넷으로 확인하고, 이메일로 접수한 학교는 메일함에서 틈나는 대로 수신 여부를 체크하기도 했다.
서류 심사 발표 날짜뿐 아니라 공지 방법도 학교마다 달랐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공고하는 학교가 있는 반면, 문자나 전화로 개별 연락을 준다는 학교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내 서류가 통과됐다는 1차 합격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내 이름만 실수로 누락된 건 아닐까 먼저 직접 전화로 확인해 본 곳도 있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쉽게도 서류가 통과되지 못했습니다. 다음번에 다시 지원해 주세요.”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가 점점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대로 포기해야만 했을까. 역시 세상은 만만치가 않다고 다시금 깨달았다. 믿어준 연인에게 왠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날 격려해 주었는데, 임용시험 공부를 정식으로 다시 해보기도 전에, 기간제 교사 근무를 시작해 보기도 전에 또 완전한 실패를 맛보는 건 아닐까.
그러나 2016년 새해가 시작되는 겨울, 여기서 미끄러질 수만은 없다는 각오를 나는 다시 다졌다. 지금까지와는 달라야만 했으니까. 이제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우리’를 실망시킬 순 없었으니까.
당시 내 일기장엔 전태일 열사의 일기 중 한 부분이 짤막하게 옮겨져 있었다.
오늘도 보람 없이 하루를 보내는구나. 하루를 보내면서 아쉬움이 없다니, 내 정신이 이렇게 타락할 줄은 나 자신도 이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 1967년 2월 14일 전태일의 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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