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라는 숨을 곳
사람이 힘이 들 때면 누구나 숨을 곳이 필요하다. 그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혼이 나거나 싫은 소리를 듣는 일이 마냥 무뎌지거나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저 지나온 시간 동안 쌓인 경험치 덕분에 '이 또한 별일 아닐 수 있다'거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라며 스스로 감정을 추스르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을 뿐이다. 어린아이처럼 그 자리에서 당황해 눈물부터 쏟아내지는 않겠지만, 마음이 얹히고 마주하기 싫은 일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는 갑자기 혼이 나거나 정신적인 충격을 받으면 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리광을 부리거나 잘하던 행동도 하지 못하게 되는 '퇴행'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곤 한다. 그렇다면 어른들은 어떤 모습으로 퇴행할 수 있는 걸까?
아흔이 넘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숙소에는 아침마다 아날로그 라디오가 틀어져 있다. 정겨운 음악과 함께 들려오는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 따르릉따르릉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기를 받고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러 나가신다. 손에는 열쇠 뭉치를 가득 들고서...
온갖 기술의 대변혁을 지나왔다. 이제는 찾아보기도 힘든 주방에 놓인 라디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기억들이 저절로 재현된다. 매일 밤 주파수를 맞추며 좋아하는 가수가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던 일, 늘어진 카세트테이프를 칭칭 감아 팽팽하게 만들던 일, 더 나아가 대문을 열어두고 살아도 안심할 수 있었던 동네와 전봇대 아래에서 말뚝박기를 하던 풍경까지.
시간이 빠르게 흐르는 것에 대한 공포 중 하나는 배워야 할 것은 너무나 많은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까 봐, 그리고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려 소중한 추억들이 모두 잊힐까 봐서이다. 그렇게 끝내 내가 숨을 곳을 빼앗길까 봐서이다.
라디오의 지지직거리는 소리에 아직도 그리운 것들이 떠오른다. 다행히도 아직 숨을 곳을 빼앗기지는 않았구나.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마음 깊이 안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