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체기를 지나는 중인가, 아니면 이 또한 계절감인가.
알 수 없는 무기력을 자주 느끼는 요즘, 유독 집 밖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겁다. 약속을 잡을 땐 흔쾌히 받아들였으면서 직전이 되면 후회가 밀려온다. '그냥 집에 있을걸, 괜히 나간다고 했나.' 자주 반복되는 증상을 보니 분명 마음이 잠수를 시도하고 있는 듯하다.
이대로 두면 더 깊이 들어갈 거고, 안 그래도 힘을 내야 하는 시기에 혼자만의 우울감과 고립감, 자기 연민에 빠져들 게 뻔하다. 그래도 내 나름 이 바닥 5년인데 이 정도는 척하면 딱 아니겠나. 이럴 땐 몸을 억지로 끌고 가면 안 된다.
지금이야말로 '자기 부양 열차'를 타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갈 때다.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 이럴 땐 평소 좋아하지만 계속 미루고 있던 소소한 것을 하는 게 필요하다. 영화! 마침 논란의 영화 '암살자들'이 상영 중이니 아내랑 함께 보러 가면 되겠다 싶어 바로 예매했다. 그리고 오늘 오전, 아이를 등원시키고 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혹자는 '왜곡자들'이라고 비난하고, 항간에는 '영화 검열'의 목소리도 나오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영화를 보고 나온 솔직한 마음은 이거였다. '대체 왜?' 정치권에서 열을 내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이쪽이나 저쪽이나 정치인들은 지지자들에게 자신을 보이는 게 중요할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배우를 향해 상식 이하의 폄하 발언을 하는 건 그야말로 몰상식한 행동이지 않나 싶었다. 영화는 영화로 보면 될 것을.
생각해 보니 내 주변에서 경험하고 있는 비상식적인 상황도 떠오르면서, 이 또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갑론을박은 차치하고 영화는 재밌게 봤다. 다만 계단 통로 건너 옆자리 손님이 별안간 코를 골며 잠든 탓에, 마시던 콜라를 집어던져 깨우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만 빼고.
영화를 향한 세간의 목소리를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고,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오자면 오랜만에 극장에서 영화를 보니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일상에서 소소하게 좋아하는 것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좋은 음식을 먹어야 좋은 에너지가 채워지듯, 좋아하는 것을 통해 마음도 좋은 기운으로 채워질 수 있다.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대부분 우리의 삶은 좋은 것으로 채워지기보다 소진되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자기 자신을 잘 부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실상 경제활동을 하는 성인 중 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겠나.
온라인 게임 생활을 할 때 '좀비 같다'는 표현을 종종 했는데, 하루를 살면서 내 취향으로 채워지는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고 흘려보낼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떠올리며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온라인 게임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여전히 어떤 날 하루는 오만 근심과 걱정을 끌어안고 속을 끓이며 보낸다.
그럴 땐 좋아하는 취미를 선택하는 것조차 무바카라임하고 뻔뻔해 보여서 오히려 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더 많이 움직여야 할 때 반대로 멈춰 섰으니, 속으로 곪아버리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그랬던 날들의 경험 덕분에 오늘은 오랜만에 집이 아닌 공간에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영화를 보고, 점심을 먹고, 카페에서 글을 쓰는,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하루가 사실은 이토록 특별한 하루가 되어줄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낀다.
밤사이 비가 내리고 났더니 기온이 제법 떨어졌다. 아직 한창이어야 할 가을이 벌써 저물어가는 것 같다. 아쉬운 마음에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형형색색은 아니지만 어슴푸레 색이 변한 가로수를 바라보며, 내가 좋아하는 가을을 마음에 담아본다.
집에만 있었다면 이 가로수의 빛깔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마음이 잠수할 땐 수면 위로 끌어올려 줄 작은 즐거움 하나면 된다. 오늘은 영화 한 편과 커피 한 잔, 그리고 저무는 가을 한 조각이 그 몫을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