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햇살을 좋아하는 아이

by알레

오후 4시의 햇살이 집 안을 따사롭게 만든다.


남향집에서 살며 가장 좋은 건 볕이 잘 든다는 점이다. 오래된 알루미늄 새시 그대로인 베란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시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32년 차 아파트의 실내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것들이 있다. 안내 방송이 나오는 천장의 스피커라든가, 도배지를 울게 만드는 매끄럽지 않은 벽면이라든가. 베란다의 알루미늄 새시도 그렇고, 살짝 휘어진 현관문도 그렇다.


신축 아파트에도 살아보고 30년 넘은 집에도 살아봤지만, 세월이 깃든 집과 동네를 더 좋아하는 건 그 자체로 무르익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무르익음이 자아내는 안온함은 제아무리 신축 아파트가 세련되고 편리하다 해도 흉내 낼 수 없는 부분이다.


만약 아파트가 살아있는 생명체였다면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을 품었을까 잠시 상상에 잠겨본다.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도 제각각일 테고, 그 제각각인 사람들의 삶은 더 다양했을 테니 풀어낼 이야기가 천일야화로도 부족할 것이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수년째 리모델링을 진행 중인데, 별다른 일이 없으면 내년 초에 이주가 시작될 듯하다. 자산의 가치가 오르는 건 좋지만, 처음 이 아파트에 왔을 때 느꼈던 평온함이 사라지는 건 꽤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더욱이 우리에겐 선물 같은 아이가 생겨난 집이기도 하니 더 뜻깊은 공간이다.


언젠가 밤에 아이와 함께 누워 대화를 나누던 중, 머지않아 이 아파트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올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이 집이 좋은데 왜 떠나야 하냐고 되물었다. 요즘 하원 후 집에 돌아오면 꼭 베란다 앞에 놓아둔 의자에 앉아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곤 한다. 하루는 "무슨 생각해?"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그냥 여기 앉아 창밖을 보는 게 좋아."


내가 그렇듯 아이도 오후의 햇살이 꽤나 좋은가 보다.


집에 대한 풍수를 믿는 건 아니지만, 지금 머물러 있는 이 집은 좋은 기운을 가득 품고 있는 집이라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오래도록 바랐던 아이를 만나게 된 집이라 더 그런 것도 있지만, 식물이 잘 자라는 집에 대해 갖고 있는 좋은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거의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도 잘 자라는 건 모두 집이 가진 좋은 기운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려나 고민이 많다. 아이의 유치원 등원 거리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지만, 그러기엔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다. 그래도 이 동네가 나름 서울에서는 변두리에 해당했는데, 천지개벽에 가까운 지역 단위 개발로 너무 많은 게 바뀌어 버렸다. 덕분에 시세마저도.


어디로 가든 지금처럼 볕이 잘 드는 집이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 마음부터 내려놓는 게 1순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예정대로라면 이번 가을, 겨울이 이곳에서의 마지막이 될 테니, 올해는 더 많은 추억을 남겨봐야겠다. 아이가 의자에 앉아 품에 담아두었던 그 볕을 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