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짜 백수...인가?

by알레

오후 2시 30분. 거실에 누워 가만히 시선이 닿는 아무 데나를 훑어보았다.


그러다 마주친 베란다의 올리브 나무. 열린 창 너머로 스미는 바람에 따라 이파리들이 살랑거리고, 내리쬐는 햇살을 기분 좋게 머금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오늘따라 세상 편안해 보였다. 정작 누워있는 내 마음은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는데.


사람 마음이 어쩜 이렇게 하루 건너 하루, 매일 달라질 수 있을까. 바로 어제만 해도 말씀을 묵상하며 넉넉히 갚아주실 하나님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채워졌는데, 은혜도 밤사이 리셋되는 걸까 싶을 정도로 오늘의 난 또다시 나를 바카라망하는 말들로 속을 끓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 속을 들여다보고 살았던 나름의 내공이 있는데, 무턱대고 일어나는 감정에 휘둘릴 순 없다. 차분히 생각을 해봤다. 왜 또 그런 걸까.


물리적으로 가장 큰 이유는 컨디션이었다. 독감의 후유증인지, 아님 비염 때문인지 오늘은 아침부터 코가 찡하면서 머리를 콕콕 찌르는 듯한 두통이 느껴졌다. 자고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은 몸 상태는 언제나 감정을 기본 마이너스 2로 떨어뜨린다.


몸이 처지니 마음도 함께 처진 탓일까. 평일 대낮에 이러고 거실에 누워있는 나 자신이 진정한 백수로 느껴졌다. 사실 지난 5년간 나의 위치는 '백수'라는 게 팩트지만, 오늘처럼 마음에서 '와, 나 진짜 백수... 인가?'라고 느껴졌던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큰 여운이 남았다.


가을이라 햇살도 좋고 거닐기도 참 좋은 계절이지만, 언젠가부터 마음속에는 '나다니는 게 다 돈이다'라는 생각이 터줏대감처럼 눌러앉아버렸다. 내 인생 40 몇 년 통틀어, 군 복무까지 모두 포함해서 요즘처럼 별일 없을 땐 집 밖을 잘 안 나가던 때가 또 있었나 싶다. 읽다 만 황보름 작가님의 에세이 제목 '단순한 생활자'처럼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기로 완전히 마음을 고쳐먹은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살아가는 중이다.


좋을 땐 좋기도 하다. 부대끼는 사람이 없어 속 시끄러울 일도 거의 없고, 애써야 할 관계도 딱히 없으니 신경 쓸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원래 사람이 몸이 편해지면 정신이 고달파진다고, 괴롭히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날 괴롭히고 앉아있는 걸 보면 이 또한 연구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루 건너 하루 달라지는 삶이니 내일은 또 다를 거라는, 어딘가 살짝 꼼수 같아 보이는 기대감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 오늘 유독 이러는 가장 큰 이유가 생각났다. 어제 종일 아직도 진행 중인 교회의 복잡한 일에 집중했더니 에너지가 너무 소진된 탓이었다. 자료들을 재검토할 일이 있어 들춰보기 싫은 1년 전의 자료들을 열어봤는데, 감정이 많이 소모되는 걸 느꼈다. 이럴 땐 차라리 아주 냉정한 사고형 인간이면 좋았을 텐데. 어쩌겠나, 태생이 감정형 인간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는걸.


써 놓고 보니, 오늘 대낮부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 마음도 베란다 올리브 나무처럼 기분 좋은 햇살을 가득 받고 싶었던 거다.


몸이 아픈 것도, 마음이 지친 것도, 결국은 다 이유가 있었다. 원인 모를 무기력이 아니라 컨디션과 피로와 감정 소모가 차곡차곡 쌓인 결과였다. 그걸 알고 나니 조금은 억울함이 덜어진다. 내가 유별나게 약해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하루였던 거니까.


올리브 나무는 자기가 편안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냥 창가에 서서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해가 나면 그 볕을 받을 뿐이다. 오늘 나에게 필요했던 것도 그 정도였는지 모른다. 억지로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 않고, 그냥 거실 바닥에 누워 이유를 하나씩 찾아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하루였다.


내일은 또 오늘과 다를 거다. 그 사실 하나를 붙잡고, 오늘의 볕이 드는 자리에 잠시 더 누워있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