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은 다 그럴까?'
미국 드라마를 보다 보면 자주 드는 생각이다. 자기표현이 확실하고, 연인이나 부부 사이라고 해도 각자의 삶이 존재하는 걸 보면 때론 신기하기까지 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각자의 선택을 존중하는 태도는 한편으론 '저게 가능하다니!'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서로의 삶에 상당 부분 중첩되어 가는 한국인의 특성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심지어 연인의 삶에 개입했다가 이별을 통보받는 경우도 보았다. 마땅히 떠오르는 표현이 없어서 '개입'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는데, 내 입장에선 너무 자연스러운 대화 정도였는데 그로 인해 관계가 깨어지기도 하다니. 실제로도 그런지 무척 궁금할 정도다.
한국 슬롯에선 친밀한 관계일수록 암묵적인 동의 관계로 재정의되는 경향이 있다. 꼭 친밀한 관계가 아니어도 같은 집단 안에 있을 때도 적용된다. 마치 온라인 회원가입 절차를 진행할 때 필수 동의사항과 선택 사항이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모두 동의에 자동으로 체크 표시가 되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서 관계가 틀어지는 순간이 오면 유독 더 괴로운 것 같다. 1:1 관계에서도 그렇지만 집단의 방향과 다른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면 서운함의 눈초리와 묘한 긴장감이 일어난다.
이럴 땐 미드에서 본 장면들처럼 갈라설 땐 갈라서더라도 서로의 입장을 시원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였으면 차라리 낫겠다 싶지만, 적어도 내 나이대의 세대는 집단에서 개인은 늘 후순위라고 배워온 세대인 만큼 말을 삼킨다. 그러다 골이 깊어져 결국 미적지근한 관계로 변질되거나, 아니면 애매하게 관계가 종료되기도 한다.
나와 같은 입장이라 생각했던 타인의 선택이 나와는 전혀 다른 곳에 있을 때 '그럴 수 있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솔직히 나조차 쉽게 그러진 못한다. 먼저는 '어떻게 그럴 수 있지?'라는 서운함부터 일어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슴이 벌렁거릴 정도의 충격을 받기도 한다. '당장 연락해서 물어볼까? 따질까?' 별별 생각이 다 올라온 다음에야 하나씩 사그라들기 시작해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래, 그럴 수 있지' 상태가 된다.
생각해 보면 내 생각이 이렇다고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관계에는 언제나 '단차'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나마 단차로 끝날 수준이면 차라리 양호한 편인지도 모른다. 어떤 경우엔 단차인 줄 알았던 것이 '낙차'였음을 뒤늦게 확인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건 내 마음뿐이라고 인정하고 살았더라면 서로 간의 괴리에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내 마음이 네 마음이고,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이라고 받아들이며 살다 보니 정작 내 마음 같지 않은 순간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 나이가 되면서 배운 건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도 '입장차'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서로의 차이는 존중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여전히 쉽지 않지만 그래도 인지하고 살아가니 이전보다는 충격이 덜하긴 하다.
단차와 낙차를 구분하는 방법은 사실 하나뿐이다. 미리 알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의 선택이 내 예상과 다를 때 그것을 배신이 아니라 그저 다른 지형으로 볼 수 있다면, 관계는 깨어지는 대신 다시 그려질 수 있다.
미국 드라마 속 사람들이 부러웠던 건 단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용기는 없다. 다만 예전처럼 모든 단차를 낙차로 오해하며 무너지지는 않으려 한다. 그거면 지금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