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장마로 하루가 습하다.
꿉꿉함이 온몸을 휘감는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틀지 않으면 움직이는 족족 등줄기에 땀이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다. 당장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을 것 같은 하늘은 점점 검게 변하더니 역시나 거센 물줄기를 퍼붓는다.
하필 아직 아이 등원 전이다. 딱 퍼붓는 그 타이밍에 등원 준비가 끝났다. 일단 기다려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소강상태를 확인하는 순간 아이를 재촉하며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나이스 타이밍이다. 거짓말처럼 비가 딱 그쳤다. 차에 타고 시동을 거니 다시 비가 한 차례 쏟아진다. 유치원에 도착하니 또 잦아들었다. 오늘 로또를 사야 하는 걸까. 무사히 아이 등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이런 날을 '운수 좋은 날'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다.
나는 비 오는 날을 대체로 싫어한다. 높은 습도, 오가는 길의 불편함, 바지 밑단이 젖는 것, 심할 경우 양말까지 젖어 하루 종일 찝찝함을 견뎌야 하는 것. 자차로 출퇴근할 땐 1시간 반, 2시간, 때론 그 이상을 체념하듯 받아들여야만 했다.
근데 오늘은 달랐다. 쏟아지는 빗소리가 유난히 시원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로 밖에 나가 비를 맞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해소되지 않는 삶의 답답함마저 다 씻겨 내려갈 것 같은 그 빗소리에 오늘따라 마음을 빼앗겼다.
잠시 멈춤 상태에서 깨어나 커피 한 잔과 빵을 먹으며 혼자만의 하루를 시작했다. 밀어둔 화장실 청소를 끝내고 나니 싱크대도 닦고 싶어 내친김에 다 닦아버렸다. 플라스틱 원두 보관 용기 손잡이가 내내 끈적거렸는데 오늘따라 마음이 제멋대로 의욕을 불태워 이것마저 닦아버렸다. 이러다가 종일 청소만 하겠다 싶어 얼른 샤워를 하는 걸로 마무리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하루가 다 지나갔다. 곧 아이 하원 시간이다.
비가 내리는 날은 일상의 왜곡이 일어나는 듯하다. 평소라면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을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질 않나, 오버페이스로 청소를 하질 않나. 정말 평소 같지 않았던 하루였다.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연신 하품이 나온다. 뒤늦게 피곤이 밀려온다. 큰일이다. 육아 아빠의 본 게임은 지금부터가 시작인데. 전초전에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퇴사 후 가장 오랜 시간 마음을 괴롭히는 생각은 가장으로서 가정을 돌보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었다. 사람들이 우스갯소리로 '가난'을 거꾸로 하면 '난가?'라고 하는 말에 과거엔 가볍게 웃고 넘어갔는데 지금은 표정이 굳는다.
오늘 아침, 오랜만에 찾아온 두려움이 마음을 굳게 만들었는데 장마 덕분에 굳은 마음이 촉촉해지다 못해 축축해졌다. 어쩌면 오늘부로 비 오는 날을 은근히 좋아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