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 왜 표정이 좋지 않아?"
아이에게 이런 질문을 받을 정도라는 게 그냥 미안했다.
어젯밤부터 이유 없이 배가 아리기 시작했다. 두통으로 이어졌다. 점점 아이를 상대하는 게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요즘 제 고집이 강해진 터라 은근한 힘겨루기가 필요한데, 하필 그런 날 컨디션이 푹 꺼지니 더 이상 상대하기가 싫어졌다.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괜한 짜증을 내지 않으려 하다 보니 신경이 오히려 더 날카로워졌다.
장염에 걸린 듯 속이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바카라 한 권 읽어주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 침대에 앉았다. 아이가 물어봤다. "아빠, 오늘 왜 표정이 좋지 않아?" 할 말이 없었다.
몸이 안 좋으면 꼭 감정도 따라서 꺾인다. 아무리 표정을 되살리려 애써도 오히려 어색해질 뿐이었다. 그래서 그냥 말았다. 바카라을 펼쳤는데 하필 어제 따라 모든 글귀가 경상도 사투리였다. 느낌 있게 읽어줬어야 했는데 너무 무미건조하게 읽은 것 같았다. 불을 끄고 누웠다. 요즘 밤마다 아이에게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는데 몸이 힘들어 준비하지 않았다. 아이는 기다렸다고 했다. 또 한 번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그 사이 아내가 돌아왔다. 아이는 다시 불을 켜고 일어나 엄마를 끌어안았다. 밀려오는 두통과 복통에 일어날 힘이 없었던 나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두통이 계속됐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아내까지 출근한 뒤 잠시 누웠다. 쉽게 잠이 들지 못한 채 오전 내내 뒤척거렸다. 결국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두통약을 먹고 샤워를 했다. 조금씩 가벼워지는 게 느껴졌다. 다행이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3시가 넘었다. 하루가 그냥 흘러갔다. 과거의 나였으면 이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강의 준비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시간을 흘려보냈다. 콘텐츠 작업을 해도 부족한 시간이 가버렸다.' 그리고 남은 하루마저 자바카라하며 보냈을 거다.
오늘의 나는 달랐다.
못난 생각들이 밀려오긴 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르게 그 생각들이 내 안에 오래 머물지 않도록 흘려보냈다. '그 생각들이 곧 나'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일으켜 세웠다. 베란다에 잠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침까지 흐리던 하늘은 어느새 개어 해가 쨍한 맑은 날이 되어 있었다. 집 안을 배회하듯 돌아다녔다. 작은 움직임도 에너지 전환엔 꽤 도움이 된다. 좋은 음악도 한몫했다.
글을 쓰며 보낸 지난 5년은 나 사용법을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덕분에 내가 어떤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가라앉는지, 그런 순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다. 나를 아는 것은 진짜 나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세상 무엇보다 가치 있는 시간이지만 정작 우리들은 그 시간의 가치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진짜 나를 알기 위해선 홀로 나에게 머무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글을 쓰며 그 시간에 머물렀고 덕분에 나를 잘 조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걸 몰랐다면 오늘 나의 하루는 내내 찌뿌둥한 하루로 끝났을 테지만, 덕분에 잘 쉴 수 있었다. 아프고 아무것도 못 한 하루였는데, 이상하게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