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무는 것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와온해변

byPhotographer akilin

해가 지는 것을 보러 와온에 갔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하루가 조금 길었고,사람들의 말이 평소보다 오래 마음에 남아 있던 날이었다.

곧장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마음이 좀 어수선했다.


그럴 때면 바다를 찾는다.

바다가 무엇을 해결해주는 것은 아니지만,그 앞에서는 잠시 생각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서일까.

와온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낮이었다.

바다는 멀리 물러나 있었고 드러난 갯벌 사이로 가느다란 물길이 이어졌다.햇빛이 그 위에서 반짝였다.

멀리 작은 배 한 척이 보였다.

바람 끝에는 어느새 계절이 바뀌는 기척이 묻어 있었다.

_MG_9722.jpg
_MG_9723.jpg

바다 가까이에 자리를 잡고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처음에는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늦은 오후였다.그러나 해가 기울기 시작하자 와온의 색이 달라졌다.

하늘의 노란빛이 갯벌 위로 번지고,무심하게 보이던 물길에도 빛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랑은 주황이 되고, 주황은 조금씩 붉어졌다.

사람들도 하나둘 바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었고,누군가는 가만히 서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인데 우리는 왜 낙조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걸까.

아마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인지 모른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더 오래 눈에 담게 되는 것.

사람의 시간도 가끔 그렇다.

지나고 나서야 아름다웠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들이 있다.

_MG_4419.jpg
_MG_4423.jpg



나에게도 돌아가고 싶은 날이 몇 번 있다.

그때 다른 말을 했더라면.

조금 더 기다렸다면.

내 마음보다 상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다면.

시간이 지나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장면들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지금의 눈으로 그 시절의 나를 판단했다.

지금이라면 조금 더 현명하게 말하고,덜 화내고,소중한 것을 오래 붙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고 있었을 리 없다.

그 시절의 나는 그만큼 알았고,그만큼 사랑했고,그만큼 서툴렀다.

그것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610978300_1937899900441419_6308076300266754899_n.jpg

해가 수평선 가까이 내려왔다.

카메라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그 순간만큼은 사진보다 눈으로 남기고 싶었다.

한낮의 강한 빛은 사라지고 하늘에는 부드러운 색이 번졌다.

하루가 끝나는 순간에 오히려 가장 따뜻한 색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끝이라는 말을 오래도록 쓸쓸하게 받아들였다.

끝난 관계와 지나가버린 시간,이루지 못한 일에는 늘 아쉬움이 따라붙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되돌아가 다른 선택을 해보곤 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아무리 장면을 바꾸어도 지나간 시간은 달라지지 않았다.


해가 사라지자 몇몇 사람들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조금 더 남았다.

낙조가 끝난 뒤의 와온에는 또 다른 시간이 찾아왔다.

붉은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를 푸른 어둠이 채웠다.

낮도 밤도 아닌 짧은 틈.

그 사이에서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예전 같으면 익숙한 질문부터 했을 것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을까.

그날은 조금 다르게 물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몇 글자 달라졌을 뿐인데 마음에 닿는 방식은 전혀 달랐다.

처음으로 과거의 나를 나무라는 대신 이해해보고 싶어졌다.

611155046_1937900010441408_8701394271520331140_n.jpg



후회는 지운다고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다.

어떤 기억은 오래 붙잡고 있을수록 그날의 진실보다 지금의 감정이 더 많이 섞이기도 한다.

모든 일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설명되지 않는 일은 그대로 남겨두고,미안했던 일은 기억하면 된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다음에는 다르게 살아보면 된다.

과거를 바꿀 수는 없어도 앞으로의 태도까지 과거에 묶어둘 필요는 없으니까.


DSC_0790.jpg

카메라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기 전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해가 머물던 곳에는 어둠이 내려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허전하지 않았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시간을 다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잃어버렸다고 여겼던 시간들을 그저 지나온 나의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날.

언젠가는 내게도 그런 날이 오기를.

아직 모든 후회를 보내지는 못했다.

그럴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던 어느 날의 나에게

더 이상 이유를 묻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사람도 나였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저무는 것들은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날의 나도 그 나름의 빛으로 하루를 건너고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