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심 문화는 익숙한 자들의 것

이것은 구차한 변명 아닌 변명.

by예나빠


미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온라인 회의 중이었는데 팀원 한 명이 중간에 회의를 나가봐야 한다며 채팅창에 짤막한 메시지를 올렸다 (회의와 상관없는 간단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경우 주로 채팅창을 이용하곤 한다. 진행 중인 회의에 방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다).


"아내가 운전 중 타이어 펑크가 났다고 연락이 왔어. 내가 지금 가서 도와줘야 해!"


이윽고 몇 명의 참석자들이 '응, 얼른 가봐'라며 채팅창에 답장을 올렸다.


지금 보면 그리 대단할 것도 아닌데 당시 나는 꽤 문화 충격을 받았다.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회의실을 떠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한국이었다면 상상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공사 구별 못하는 무바카라임한 직원으로 찍히기 딱 좋았을 것이다.


그 이후로도 비슷한 경우를 자주 보게 되었다. 개인 적인 사정으로 회의를 나가거나, 사전에 고지하고 회의를 불참하는 경우들 말이다. '관공서와 약속이 있어', '아이를 학교에서 픽업해야 해', '치과 가야 해', '자동차 엔진오일 갈아야 해' 그 사유도 참 다양했다. 심지어 '지금 개 밥 주러 가야 해'도 있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미국 회사의 유연한 근무 환경 때문이다. 주간에 개인적인 사정이 발생하면 업무시간이라도 몇 시간씩 자리를 비울 수 있다. 저녁 먹고 나서든 그다음 날 아침 일찍이든, 개인이 시간을 알아서 내 하지 못했던 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과정보다는 결과만 따지는 조직 문화 덕분이다.


그런데, 미국 회사의 유연한 근무 환경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축은 바로 가족 중심 문화다. 미국 슬롯 전반적으로 일보다 가족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당연시되고 있다. 한국은 산업화 이후부터야 가정이 조금씩 핵가족화되었다. 이와 달리 미국은 1950년대부터 이미 핵가족이 보편적으로 자리 잡았다. 부모와 자녀만으로 구성된 가족은 소수의 구성원으로 이뤄진다. 자유와 평등,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미국 문화와 맞물리면서 슬롯 구성원들은 더욱 가족에 집중하고 가족 간의 유대를 가장 높은 가치로 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화에서는 가사(家事)와 일이 충돌할 때 늘 가사가 우선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직업은 가족을 부양하는 수단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다.


한국에서는 늘 일 때문에 가족은 뒷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회식, 야근은 일상이었고, 어린 자녀 양육은 고용인에게 맡겨야 했다. 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휴가나 반차를 써야 했다. 휴가 시스템에 그 사유를 올릴 때 개인적인 사정을 대는 것에 왠지 죄바카라감마저 가져야 했다. 결국 구구절절이 사유를 입력하는 대신 짤막히 한 단어를 올렸다. '가사'였다.


이랬던 내가 말로만 듣던 가족 중심 문화를 직접 접하게 되니 마치 신세계에 온 것 같았다. 출근 전 아이와 한 시간씩 놀아주고, 아내가 아프다고 전화라도 오면 바로 퇴근했다. 주말은 온전히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었다. 우선순위를 가족에 두는 것에 전에 없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 것이 고기라고 했던가. 일보다 가족을 우선했을 때 마음 한편 불안함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마음. 퇴근 후 저녁을 먹으면서도 문득 낮에 짜던 코드가 생각났다. 아이들에게 바카라을 읽어주면서도 내일 주간 미팅 때 해야 할 말을 생각했다. 결국, 가족들이 다 잠든 밤이면 다시 바카라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고 회사 PC에 접속했다. 우습게도 심리적 안정감이 찾아왔다.


미국은 일보다 가족이라지만, 그 문화를 온전히 누리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미국 이주 후 얼마 동안은 '회사에 적응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적응이 끝난 후에는 '영주권 받기 전까지는 신분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영주권을 받고 난 이후에는 '더 나은 연봉을 위해'라는 이유를 만들었다. 그렇게, 가족보다 일을 우선하게 될 때면 난 어느새 자신을 합리화할 이유를 찾고 있었다.


일종의 부작용일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대학원, 대기업에서 도합 18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일이 우선시 되는 수직적 조직 문화가 내 몸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라는 인간 자체가 가족을 등한시하는 이기적인 존재였는지 모르겠다. 복잡하고 골치 아픈 가사라도 발생하면, 가장으로서 바카라임 있는 모습을 보이기보다 회피하는 편을 택했으니. 그때마다 '일'은 더할 나위 없는 그럴싸한 대의명분이 되어 주었다. 시스템이 문제였는지 내가 문제였는지 분간하기 힘든 만큼 18년의 시간은 길고만 길었다.


미국에 온 지 5년이라지만, 내 안의 자리 잡은 부조리를 거둬내기엔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그 세배가 넘는 시간을 나는 한국에서 보냈고,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보수적이 되어간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꼰대 멘트를 날릴 때면 깜짝깜짝 놀라기까지 한다. 그만큼 젊은 날 보낸 시간과 환경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뒤늦게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는 후회를 말이다. 퇴근 후면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사랑하는 가족들의 얼굴로 채웠으면 한다. 일이라는 밥벌이 수단에 잠식당해, 정작 식사를 함께 하는 가족에 소홀한 일이 없기를 바란다. '가족 중심 문화는 익숙한 자들의 것'이라면 이제는 익숙해질 차례다. 너무도 당연한 것에 노력이 필요하다니 너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몇 년 전 회사에서 2박 3일로 큰 행사가 열렸다. 엔지니어와 연구원들이 자신의 연구를 발표하는 사내 콘퍼런스였다. 장소는 본사에서 차로 5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도시에서 열렸고, 일정이 월화수 주초로 잡히게 되었다. 나와 함께 참석하는 친구는 숙박을 위해 일요일 밤부터 호텔을 예약했는데, 유독 매니저는 월요일 새벽같이 일어나 출발하겠다고 고집했다. 고생스럽지 않겠냐고 물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주말을 희생하고 싶지 않다"


일을 위해 가족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그의 모습이 내 것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이민자로서 내가 미국에 동화되는 첫 번째 길일 것이다.



- 예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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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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