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로 이직한 이튿날, 처음으로 매니저와 일대일 면담을 하게 되었다. 매니저는 각 팀원들과 주 1회씩 면담을 진행하는데, 면담을 통해 팀원들의 업무 진행사항을 파악하거나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곤 한다. 첫 면담에서 매니저와 나는 팀에서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사내에서의 팀의 역할, 지향하는 가치 등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미국에 막 도착해 모든 것이 낯설고, 팀에 빠르게 적응해야 했던 내게는 꽤 유익한 시간이었다.
한국에서만 온라인 게임을 다녔던 나는 미국 회사의 조직문화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그래서, 실질적인 회사생활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졌다. 매니저는 근태, 휴가, 평가방식 등에 대한 나의 질문에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의 답변들 중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말이 있다.
"나는 네 시간을 관리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를 코칭(coaching)하는 사람이다."
'출퇴근 시간 가이드라인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꽤나 생소하게 들렸다. 이전까지 나는 정해진 규칙을 따르는 조직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 온라인 게임에서도 탄력 근무제를 시행해 '주어진 시간을 채우는 조건하에' 유연하게 자기 업무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이 매니저의 관점은 이런 업무시간의 자유로운 조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주 단위나 월 단위로 정해진 바카라임 근무시간 같은 것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고 그의 관심사항도 아니었다. 매니저의 관심은 오로지 팀원의 일이 잘 진행되는지, 자신이 도와줄 것이 있는지에만 있었다.
미국 회사의 '매니저들'은 팀과 경영진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한다. 매주 진행되는 팀 미팅을 통해 프로젝트들의 진행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정리해 경영진에게 보고한다. 이 과정에서 팀의 연구 결과물이 회사의 제품에 채택되도록 경영진을 설득하기도 한다. 또한, 경영 전략이나 로드맵 등 상위 조직에서 내려진 주요 결정사항을 팀원들과 공유함으로써, 팀원들에게 자신의 프로젝트가 회사의 방향에 어떻게 맞춰지는지 알려준다.
그래서, 팀 전체의 프로젝트를 조율하는 일은 매니저의 가장 중요한 업무다. 팀원들은 필요하면 관련부서의 엔지니어들과 직접 소통하며 각자가 맡은 프로젝트의 연구 개발에 집중한다. 매니저는 기술적인 부분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지만, 주기적으로 진행사항을 점검하고 피드백을 준다. 그리고 회사의 상황, 중요성, 시의성에 따라 해당 팀원과 상의하여 프로젝트를 보류하거나 전환하는 등 그 방향까지도 결정하게 된다.
또한, 매니저는 외부 기관(학교, 회사, 연구소)과의 대외적인 협력이나 신규 인력 채용부터, 팀에서 필요한 장비 구매와 같은 사소한 일까지 모두 전담함으로써 팀원들이 본업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위에서 내려온 잡다한 서류 작업(paper work)이 실무진에게 전달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매니저의 하루 일과는 다양한 회의들로 채워진다. 팀 주간, 경영진 보고, 프로젝트별 실무진(working group), 팀원과의 면담, 외부 협력, 채용 등 많은 회의에 참석하거나 주관하는데, 회의록을 작성하는 일도 오로지 매니저의 몫이다.
팀원을 평가하는 일은 매니저의 권한이자 바카라임인 또 다른 중요한 업무다. 해마다 평가철이 되면 팀원들의 일 년간의 업적을 평가하여 등급을 바카라정한다. 이는 이듬해 팀원이 받는 연봉, 보너스, 주식에 직결되기 때문에 최대한 공정성을 유지하려 하는데, 이를 위해 매니저는 평가철에 팀원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눈다. 평가와 동시에 팀원의 장단점에 대해 솔직한 피드백을 주며 팀원의 성장을 돕는다.
매니저는 팀원의 성장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팀원들의 성장이 곧 팀의 성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팀원들이 진급에 동기부여를 가질 수 있도록 사내 기준을 환기시키며, 부족한 항목에 대해서는 별도의 교육 기회도 제공한다. 예를 들면 나와 같은 비영어권 직원들이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과 같은 외부 수업을 듣거나 개인 튜터를 고용하는데 금전적 지원을 하는 식이다. 그렇게 성장한 직원들이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날 수도 있지만, 매니저들은 이들에게 악감정을 품지 않는다. 회사가 직원에게 더 좋은 대우를 해주지 못한 것에 아쉬움만 있을 뿐이다. 떠나는 직원의 밝은 미래를 빌어주며 흔쾌히 보내주곤 한다.
이렇듯 팀원들의 성장을 돕는 것이 한편으로는 그들의 경력을 향상시킴으로써 회사를 떠나게도 할 수 있다. 이는 팀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팀원의 성장은 이런 상황을 대비한 위험 관리(risk management)가 될 수도 있다. 좋은 매니저는 어느 한 두 명의 뛰어난 직원에 의해 프로젝트가 좌우되지 않도록 팀의 수준을 유지하곤 하는데, 이를 위해서라도 모든 팀원들이 고르게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실리콘 밸리의 Netflix 같은 회사는 좋은 매니저의 덕목으로 지속적인 팀원의 순환을 꼽는다고 한다. 매니저는 팀원을 잘 성장시켜야 하고, 성장한 팀원이 회사를 떠나더라도 좋은 인력을 잘 유입시키고, 장기간 성과를 내지 못하는 팀원이 있다면 단호히 외부로 보낼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관점에서는 같은 팀원들이 오랜 시간 한 팀에서 근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 회사로 이직 후 매니저를 보며 놀란 점이 또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무실에는 같은 팀원들의 큐비클(cubicle, 파티션으로 나눠진 좌석)은 모여 있는데, 매니저의 자리는 그중에서 가장 좋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복도 쪽에 위치해 있어서 누구나 꺼릴만한 좌석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발적으로 그 자리를 선택했고 업무 집중도가 좋을 만한 공간은 모두 팀원들에게 양보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회사의 임원, 사장단들 조차도 자신만의 방을 따로 갖지 않고 직원들과 똑같은 큐비클을 사용하고 있었다. 페이스북의 주커버그도 별도의 사무실을 갖지 않고 그때그때 남는 자리를 사용한다고 하던데, 말로만 듣던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실제로 접하니 일종의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다. 좌석의 크기나 위치가 곧 직급이나 권위를 상징했던 한국에서의 경험과는 사뭇 대조적이었기 때문이다.
학회 출장을 갔을 때였다. 쉬운 접근성을 위해 팀원들은 모두 한 호텔을 예약해 묵었는데, 후발대로 합류한 매니저는 별도의 호텔을 예약해 숙박을 했다. 학회 기간중 저녁 일정을 마치고 매니저를 차로 호텔에 데려다주게 되었는데, 그가 묵는 호텔이 무척 허름해서 깜짝 놀랐다. 팀원들도 그다지 비싼 호텔에 묵지 않았지만, 매니저는 자신의 몫을 포기하면서 팀의 비용 절감에 앞장선 것이다.
물론 이는 매니저가 스스로 자기희생을 했다기보다, 명분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미국식 조직문화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하지만, 매니저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팀원들이 자신에 일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필요하면 자신이 몫까지 아껴가며 물적 인적 자원을 지원하는 모습은 한국의 여느 '관리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의 매니저가 하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경영진을 설득하고, 팀원들과 소통하면서 성장을 격려하고, 때로는 자기희생까지 감수할 수 있는 고도의 소프트 스킬(soft skills)을 보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매니저는 연차가 높거나 실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닌, 계량화할 수 없는 이 '매니지먼트(management)'라는 고유의 업무를 잘하는 사람이 맡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매니저와 실무자 트랙을 일찍부터 구분하여 각자를 별도의 전문직으로 분류하고 직원들을 양성한다.
한국에서는 통상 실무자들 중 연차가 쌓이거나 좋은 고과를 받은 직원들이 팀장, 관리자가 되곤 한다. 조직의 상하관계가 중요한 전통적인 위계 조직에서는, 연차가 쌓여도 관리자가 되지 못하면 아무리 실무능력이 뛰어나도 조직에서의 위치가 애매해질 수밖에 없다. 관리자와 실무자는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뛰어난 실무자들도 실무자로서 더 이상의 경력을 포기하고 관리자의 길로 들어서곤 한다. 그리고, 임원을 지향하며 조직에 최적화된 '관리자'가 되어간다.
그렇다고 한국의 관리자들에게 미국식 매니저가 되라고 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인사나 관리 방식 등 오랜 기간 쌓여온 기업의 조직 문화, 나아가 산업군의 고용 유연성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이라고 앞에서 서술한 좋은 매니저만 있는 것도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온 다양한 인종이 모여 있는데 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보이지 않는 인종 차별, 마이크로 매니징(micro-managing), 심지어 가스라이팅(gaslighting)까지 일삼는 매니저도 있다고 들었다. 그만큼 인간관계는 국적을 불문하고 가장 어려운 것일 것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다. 한국에서 관리자였던 나는 과연 좋은 매니저였는지 자신할 수 없고, 한국에서 내가 만났던 좋은 관리자들도 떠오르기 때문이다. 모쪼록 한국의 관리자들이 팀원의 성장을 돕고, 자기희생을 감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조직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관리자와 실무자의 커리어를 지속해도 은퇴가 가능한 문화가 정착되면, 관리업무가 보다 전문화될 것이고 대인관계, 리더십, 팀빌딩, 소통 능력 등 소프트 스킬이 좋은 관리자들이 더 많이 등장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의 관리자들도 더 이상 팀원을 관리하는 상사가 아닌 그들을 돕는 코치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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