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공간은 시간을 철거하지 않는다

‘종로의 외딴섬’과 오래된 골격을 살리는 공간기획

image.png종로 광장시장 근처에 '외딴섬'을 콘셉트로 기획한 '아마츄어작업실 광장시장점'(2018-현재)


15년 동안 비어 있던 집


종로에 두 번째 공간을 기획하게 되었을 때 내가 처음 만난 것은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시간이 멈춰 있던 집이었다. 약 15년 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은 채 비어 있었고, 처음 내부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 공간이 과거에 어떤 모습이었는지 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천장에는 덴조가 쳐져 있었고, 여러 차례의 수리와 인테리어가 반복되면서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구조는 대부분 새로운 마감재 뒤에 숨어 있었다.

공사를 준비하면서 대들보와 기존 구조를 하나씩 확인하다 보니 이 건물이 1959년에 지어진 오래된 가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층과 2층으로 이루어진 일본식 주택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천장을 가리고 있던 마감재 안쪽에는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서까래와 골격이 숨어 있었다. 내가 처음 보았던 것은 낡은 건물의 마지막 모습이었지만, 그 안에는 전혀 다른 시대의 공간이 여러 겹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가지 질문이 생겼다. 오래된 공간을 새롭게 만든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낡은 것을 모두 걷어내고 새로운 재료로 덮는 것이 새로움일 수도 있지만, 이미 그곳에 존재했던 시간을 다시 드러내는 것 역시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 집을 바라보면서 무엇을 더할 것인가 보다 먼저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공간에는 여러 시대가 겹쳐 있다


오래된 건물은 한 번에 만들어진 모습 그대로 남아 있지 않는다. 사람이 살고 가게가 들어오며 필요에 따라 벽을 만들고 천장을 낮추고 바닥을 덧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하나의 건물 안에 서로 다른 시대의 흔적이 겹쳐진다.

특히 한국의 도시공간은 빠른 현대화를 통과하면서 효율성과 편의성을 중심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높은 천장은 관리하기 편하도록 낮아졌고, 오래된 목재와 구조물은 새로운 마감재 뒤로 숨어들었으며, 울퉁불퉁한 벽과 기둥은 반듯한 표면으로 정리되었다. 한동안 현대적인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이전의 흔적을 지우고 깨끗한 박스 안에 새로운 인테리어를 넣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당시에는 더 효율적이고 깨끗하며 관리하기 쉬운 공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가치였고, 건축과 인테리어 역시 시대의 요구에 반응했을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다시 오래된 것에서 다른 종류의 가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낡은 목재와 오래된 벽, 사용한 흔적이 남은 계단과 창틀을 더 이상 단순히 철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레트로 문화가 다시 주목받고, 이후 새로움과 복고적 감각을 결합한 ‘뉴트로’라는 표현이 익숙해진 것도 이런 변화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복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오래된 구조와 이야기를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사용하는 방식이 하나의 공간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공간기획에는 두 개의 방향이 있다


나는 공간을 기획할 때 크게 두 가지 방향을 생각하게 된다.

하나는 이미 존재하는 골격과 이야기를 읽고 그것을 다시 살려내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비교적 비어 있는 구조 위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입히는 방식이다.

후자의 경우를 나는 종종 ‘박스형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신축건물이나 구조가 단순한 상가에서는 기본적인 공간을 하나의 빈 상자처럼 놓고 그 위에 브랜드의 색과 재료, 가구와 조명, 그래픽을 덧입히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다. 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던 과거보다 앞으로 어떤 이미지를 만들 것인가가 더 중요해지는 방식이다.

반대로 오래된 건물을 만났을 때에는 전혀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 먼저 벽과 천장, 기둥과 계단을 살펴보고 왜 이런 구조가 만들어졌는지, 어느 부분이 처음부터 존재했고 어느 부분이 나중에 덧붙여졌는지를 읽은 뒤, 그 안에서 다시 보여줄 가치가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 경우 공간기획은 새로 만드는 작업이라기보다 발굴에 가까워진다.

무엇을 추가할 것인지보다 무엇을 걷어낼 것인지, 무엇을 없애지 않고 남길 것인지가 먼저 중요한 질문이 된다. 오랫동안 덮여 있던 천장을 열어 서까래를 드러내고, 처음부터 존재했던 목구조를 다시 보이게 만드는 순간 공간의 역사가 현재의 인테리어가 된다.

나는 이런 작업을 과거를 그대로 복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래된 집을 박물관처럼 보존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골격을 오늘의 사용방식 안으로 다시 불러오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공간에는 이미 이야기가 있다


브랜드를 만들 때 우리는 흔히 공간에 어떤 이야기를 입힐 것인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러나 오래된 공간을 만나면 순서를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넣기 전에 이미 그곳에 존재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들어보는 것이다.

1959년에 지어진 종로의 이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십 년 동안 여러 사람이 이 공간을 거쳐갔고, 그때마다 누군가는 벽을 만들었으며 누군가는 천장을 가리고,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바닥과 문을 덧붙였을 것이다. 내가 만난 공간은 한 시대의 모습이 아니라 여러 시대가 차례로 지나가며 남긴 결과였다.

15년 동안 비어 있었다는 사실 역시 이 건물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오랜 시간 사람이 드나들지 않은 집은 단순히 낡은 건물이 아니라 도시 한복판에서 잠시 기능을 멈춘 장소처럼 느껴졌다. 주변의 종로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지만 이 건물만은 그 흐름에서 떨어져 홀로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외딴섬’을 떠올렸다.

바다 한가운데의 섬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서울 한복판에서 오랫동안 잊혀 있던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콘셉트를 ‘종로의 외딴섬’이라고 정하게 되었다.


서울 한복판에 작은 섬을 만든다는 것


외딴섬이라는 말에는 고립의 이미지도 있지만, 나는 오히려 잠시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의미에 더 끌렸다.

서울은 빠르게 움직이는 도시다. 특히 종로는 오랫동안 사람들이 만나고 일하고 이동하며 물건을 사고팔아온 밀도 높은 지역이고,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시대와 기능이 겹쳐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한복판에서 잠시 도시의 속도로부터 떨어질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사람이 문 하나를 통과하는 순간 완전히 다른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서울의 속도에서 한 발 비켜나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외딴섬’이라는 콘셉트는 단순히 오래된 건물에 붙인 이름이 아니라 이 공간에서 사람이 경험했으면 하는 시간을 설명하는 말이 되었다.

오래된 목조구조와 높은 천장을 다시 드러내는 일 역시 그 콘셉트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새것처럼 완벽하게 정리된 공간보다 오래된 골격과 재료가 남아 있는 곳에서는 시간이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는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사람 역시 모든 것이 빠르게 교체되는 도시에서 잠시 다른 감각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흔적을 살리는 것은 결국 옛날처럼 보이게 만드는 장식이 아니라, 그 공간이 가진 시간의 속도를 되찾아주는 일이었다.


복원은 과거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다


레트로 공간을 만든다고 하면 오래된 가구를 가져다 놓거나 낡아 보이는 재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오래된 공간의 가치는 표면적인 낡음에 있지 않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곳에 실제로 존재했던 구조와 시간이기 때문이다.

새 나무를 오래된 것처럼 가공하고 벽을 일부러 바래게 만들 수는 있지만, 1959년부터 그곳을 지탱해 온 대들보의 시간을 새로 만들 수는 없다. 여러 사람이 오르내리며 닳은 계단이나 오랫동안 건물을 받치고 있었던 목재에는 디자인으로 복제하기 어려운 시간이 들어 있다.

그렇다고 오래된 것을 무조건 남기는 것이 좋은 공간기획이라는 뜻도 아니다.

사용하기 위험한 구조는 보강해야 하고, 위생과 안전에 문제가 있다면 교체해야 하며, 현재의 기능에 맞지 않는 부분은 과감하게 바꿀 필요도 있다. 중요한 것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보존하거나, 반대로 새것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철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남길 가치가 있는지 판단하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복원과 디자인이 만난다.

과거의 흔적을 존중하면서도 오늘의 사람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명과 동선, 가구와 설비를 새롭게 조정하고, 오래된 구조와 현대적인 요소가 서로 충돌하지 않도록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뉴트로의 의미도 결국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사용하는 것이다.


열 달 동안 공간을 읽다


종로의 외딴섬을 만드는 과정은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15년 동안 비어 있던 공간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인테리어보다 먼저 해결해야 할 기본적인 문제가 많았고, 구조를 확인하고 보강하며 필요한 설비를 다시 만드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결국 공사는 약 10개월 동안 이어졌다.

빠르게 인테리어를 끝내고 문을 여는 방식과 비교하면 매우 긴 시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기간 자체가 공간을 이해하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하나를 걷어내면 그 뒤에서 다른 구조가 나타났고, 처음에는 없애려고 했던 부분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흔적을 발견하면서 계획을 다시 바꾸기도 했다.

오래된 건물을 다루는 일은 미리 그려놓은 디자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 다르다. 도면보다 실제 건물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경우가 많고, 공사를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공간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설계하는 능력만큼 기다리는 능력도 필요하다.

처음 생각했던 완성형에 건물을 억지로 맞추기보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조건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조금씩 판단을 수정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열 달이라는 시간은 공사가 늦어진 시간이 아니라 이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수 있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좋은 공간기획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일만은 아니다


익선동의 첫 공간이 내 안에 있던 ‘나의 작업실’이라는 이야기를 현실로 꺼낸 곳이었다면, 종로의 외딴섬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공간이 가지고 있던 시간을 읽는 일에서 시작했다.

1959년에 지어진 집, 여러 번 덧대어진 인테리어, 15년 동안 비어 있었던 시간, 천장 안에 숨겨져 있던 서까래와 오래된 골격을 하나씩 바라보다 보니 그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 넣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충분한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이야기를 모두 지우고 새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람들이 다시 경험할 수 있도록 필요한 부분을 살리고 새로운 기능과 연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공간기획에는 두 종류의 창작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비어 있는 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창작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게 된 이야기를 발견해 다시 들려주는 창작이다.

종로의 외딴섬은 후자에 가까웠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집의 천장을 열고 오래된 골격을 다시 드러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다시 사용하는 일이었다.

좋은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언제나 새것을 만드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때로는 너무 많은 시간이 덧대어져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하나씩 걷어내고, 그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을 다시 발견하는 일이 더 창조적일 수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15년 동안 멈춰 있던 집을 다시 열면서 내가 만들고 싶었던 것도 결국 그런 공간이었다. 과거로 돌아가는 박물관도 아니고 오래된 분위기만 소비하는 레트로 카페도 아니라, 1959년의 골격 위에 지금의 사람이 머물 수 있는 시간을 얹은 작은 섬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간을 기획할 때 늘 먼저 묻는다.

이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입혀야 하는가, 아니면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다시 살아나게 해야 하는가.

종로의 외딴섬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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