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슬로와 나의 작업실, 그리고 내면을 공간으로 꺼내는 일
2016년 종로 익선동에서 첫 번째 카페를 기획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커피도, 인테리어도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나의 작업실’이라는 공간이었다.
나는 약 10년 동안 해외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내성적이었고, 사람을 자주 만나거나 많은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낯선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시간도 많아졌는데, 그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이 내게는 글과 그림, 사진이었다.
처음부터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혼자 글을 쓰다가 대학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다가 미술 교수님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작품을 전시했으며, 사진 역시 사진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전시로 이어졌다. 대학에서 공부한 전공은 심리학이었지만, 강의실 밖에서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서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나 자신을 표현하며 살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의 꿈이 생겼다. 언젠가 사진과 그림, 글쓰기를 한곳에서 할 수 있고 한쪽에서는 커피도 볶을 수 있는, 온전히 나만의 작업실을 갖고 싶다는 꿈이었다.
몇 년이 지나 실제로 카페를 만들 기회가 생겼을 때, 오래 전의 그 꿈은 자연스럽게 공간의 콘셉트가 되었다.
첫 카페는 익선동의 오래된 서민한옥에 자리 잡았다. 약 32평 정도의 공간에 네 개의 방이 있었는데, 나는 그 방들을 보면서 내가 유학생활 동안 해왔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한 방에는 내가 찍어 전시했던 사진을 걸었고, 다른 방에는 내가 그렸던 그림을 놓았다. 또 다른 방에는 대학신문에 기고했던 글과 칼럼을 전시했으며, 마지막 방은 커피를 볶는 로스팅 공간으로 만들었다. 사진과 그림, 글과 커피라는 서로 다른 활동이 한 채의 한옥 안에서 네 개의 방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지금 돌아보면 대단한 브랜드 전략을 세운 것도 아니고, 소비자를 분석해 공간을 설계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장 개인적인 기억과 취향을 공간 밖으로 꺼내놓은 것에 가까웠다.
그런데 바로 그 개인적인 이야기가 공간의 가장 분명한 정체성이 되었다.
흥미로운 변화는 카페를 연 뒤에 시작되었다. 작업실이라는 콘셉트 때문인지 자연스럽게 작가와 사진가, 예술가들이 찾아왔고, 서로의 작업을 이야기하거나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아지트처럼 공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사진과 그림, 글로 채워져 있던 공간도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작가들의 작품으로 조금씩 바뀌었다. 내 사진이 걸려 있던 자리에 다른 사진가의 작품이 들어왔고, 그림을 전시했던 방에도 새로운 작가들의 작업이 걸렸다.
그때 나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의 작업실’이라는 이름으로 만든 공간이 반드시 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남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오히려 내가 가장 솔직하게 좋아했던 것들을 꺼내놓았기 때문에 비슷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와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내 작업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사람의 작업실이 되었다.
브랜드를 만들 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이 충분히 구체적이면 오히려 다른 사람과 만날 가능성이 생긴다. 누구에게나 좋아 보일 만한 것을 만들려고 할 때보다 한 사람이 오래 좋아해 온 것을 정확하게 보여줄 때 공간은 더 분명한 목소리를 갖게 된다.
이 경험을 돌아볼 때마다 나는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자아실현이라는 개념을 떠올린다.
매슬로의 욕구이론은 흔히 생리적 욕구에서 안전, 소속과 존중을 거쳐 자아실현으로 올라가는 피라미드 형태로 설명되지만, 실제 인간의 욕구가 언제나 하나의 엄격한 계단처럼 움직인다고 볼 필요는 없다.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 단계 자체보다 인간이 단순히 살아남거나 인정받는 데서 끝나지 않고, 자신 안에 있는 가능성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안에 어떤 욕망과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음악을 하고 싶어 하고, 누군가는 글을 쓰고 싶어 하며, 누군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마음속에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그것을 실제 삶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나에게 2016년 익선동의 카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자아실현이었다. 유학생활 동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작업실이 오랜 시간을 지나 실제 공간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내면에만 있던 것이 바깥의 세계로 나온 순간이었다.
이 경험 이후 나는 브랜딩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브랜드를 만든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남들과 다른 이름, 다른 로고, 다른 메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장에 없는 것을 찾아야 하고, 경쟁 브랜드보다 더 독특해야 한다는 부담도 느낀다.
하지만 좋은 브랜딩이 반드시 없는 이야기를 새롭게 발명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자신 안에 이미 오래 존재했던 것을 발견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다.
내 첫 카페에는 특별히 만들어낸 서사가 없었다. 유학시절 혼자 글을 쓰던 학생, 그림을 그려 전시했던 학생, 사진을 찍던 학생, 언젠가 작업실을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이 있었고, 그 시간들이 익선동의 네 개 방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나의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카페와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그래서 브랜딩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어떻게 남들과 다르게 보일 것인가”보다 “나는 무엇을 오래 좋아해 왔는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무엇을 할 때 가장 나답다고 느끼는지,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 가운데 무엇을 제품과 공간, 서비스의 형태로 꺼낼 수 있는지를 먼저 바라보는 것이다.
차별화는 그 뒤에 따라오는 결과일 수 있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자동으로 브랜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취향과 추억을 늘어놓는 것과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드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브랜딩에는 번역이 필요하다.
내가 사진을 좋아한다는 사실은 어느 사진을 어느 벽에 걸 것인지라는 선택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림을 그렸던 경험은 공간의 전시방식과 분위기로 표현되어야 한다.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메뉴판의 문장이나 공간의 언어로 나타날 수 있고, 커피에 대한 생각은 어떤 생두를 선택하고 어떻게 볶으며 어떤 잔에 담아 제공할 것인지로 이어진다.
나는 이 과정을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연출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일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꺼내놓는 일이다. 영화감독이 머릿속의 장면을 배우와 빛, 음악과 카메라를 통해 관객에게 보여주듯, 카페 운영자는 자신의 생각을 공간과 커피, 음악과 가구, 메뉴와 서비스를 통해 손님에게 전달한다.
좋은 브랜드는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 밖에서 경험되는 것 사이의 거리가 크지 않다.
브랜드의 자아실현은 개인의 자아실현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세계 안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를 남겨야 한다는 점이다.
익선동의 작업실이 내게 특별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내가 원했던 공간을 만들었다는 사실도 중요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곳에 다른 작가들의 작품이 들어오고 새로운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더 흥미로웠다.
운영자의 취향이 너무 강해 다른 사람이 들어갈 틈이 없다면 개인의 작업실로는 훌륭할 수 있어도 좋은 브랜드가 되기 어렵다. 반대로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자기 이야기를 지워버리면 공간은 편안해질 수 있지만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함께 희미해질 수 있다.
좋은 브랜드는 자신의 목소리를 가지면서도 다른 사람이 그 안에 자신의 시간을 더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작업실’이 시간이 지나 ‘우리의 작업실’처럼 변해갔던 경험은 내가 브랜딩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는 그래서 브랜딩을 자아실현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아닌 무엇 인가처럼 보이기 위해 외형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오래 좋아해 왔는지를 발견한 뒤 그것을 현실의 형태로 구현하는 과정이다.
2016년 익선동에서 내가 처음 만들고 싶었던 것은 거대한 브랜드가 아니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보고, 한쪽에서 커피를 볶을 수 있는 오래된 꿈속의 작업실이었다.
그런데 가장 개인적이었던 그 공간에 사람들이 찾아왔고, 작가와 사진가들의 아지트가 되었으며, 내 작품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다른 사람의 작품이 걸리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 자체가 브랜딩이었다.
내면에 있던 작은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공간으로 만들고, 그 공간을 다른 사람이 경험할 수 있도록 열어두자 개인의 이야기는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매슬로가 인간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하려는 방향이 있다고 보았듯, 브랜드 역시 자신이 될 수 있는 모습에 가까워지는 과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브랜딩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더 다르게 보일 것인가”보다 “내 안에 있는 무엇을 현실로 만들 것인가”일지도 모른다.
내게 그 질문의 첫 번째 대답은 ‘나의 작업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