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미아동의 ‘시집’ 카페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한 오래된 여관을 새로운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위층은 여성 전용 셰어하우스로 만들고, 지하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카페를 기획하는 일이었다. 이미 숙박을 위해 만들어졌던 건물을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단순히 방을 새로 꾸미거나 카페를 하나 넣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여관이라는 공간은 원래 잠시 머물다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었다. 누군가에게는 하룻밤을 보내는 방이었고, 다음 날이면 다시 낯선 사람이 그 자리를 사용했다. 그런데 그곳을 여성들이 일정 기간 생활하는 셰어하우스로 바꾼다는 것은 공간의 성격 자체를 바꾸는 일이었다. 잠시 머무는 방을 자신의 일상을 쌓아가는 방으로, 익명의 숙박공간을 각자의 생활이 존재하는 공간으로 바꾸어야 했다.
그때 자연스럽게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이 떠올랐다.
울프의 바카라에서 ‘방’은 단순한 건축적인 공간만을 뜻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이어가고 글을 쓰며 타인의 요구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물질적인 조건과 연결되어 있다. 나는 그 개념을 셰어하우스에 그대로 옮기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더라도 각자가 잠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깊이 공감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를 바라보는 중심에는 자연스럽게 ‘자기만의 방’이라는 문장이 자리 잡았다.
셰어하우스라는 공간은 흥미로운 모순을 가지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한 건물에서 부엌과 거실, 복도와 같은 공간을 함께 사용하지만 동시에 각자에게는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이 필요하다. 공동체와 독립이 한 건물 안에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이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공동생활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사람과 관계해야 하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문을 닫는 순간 모든 관계가 단절되는 기숙사 같은 구조로만 남아서도 안 됐다. 만나고 싶을 때 만날 수 있고, 혼자 있고 싶을 때 자신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다.
그 연장선에서 옥상도 중요한 공간으로 보였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루프탑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공간이 많지 않았고, 오래된 건물의 옥상은 대개 설비나 물건을 두는 장소 정도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도심에서 하늘을 직접 바라볼 수 있는 옥상은 생각보다 귀한 공간이었다.
방이 혼자 생각하는 실내의 공간이라면 루프탑은 잠시 방 밖으로 나와 도시와 거리를 두는 또 하나의 ‘자기만의 자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할 수 있지만 반드시 대화해야 할 필요는 없고, 의자 하나에 앉아 바람을 맞거나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렇게 위층의 셰어하우스와 옥상에는 ‘자기만의 방’이라는 하나의 문학적인 이미지가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하였다. 셰어하우스 아래에 카페를 넣기로 했지만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부대시설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위층의 ‘자기만의 방’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면서도 카페 자체로 하나의 분명한 이야기를 가져야 했다.
공간의 과거를 살펴보던 중 흥미로운 흔적을 발견했다. 그 지하가 과거에도 다방으로 사용되었던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오래된 다방의 간판이 남아 있었고, 지금 우리가 카페를 만들려고 하는 바로 그 자리에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차와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던 장소가 이미 존재했다.
새로운 카페를 만들면서도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발명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층에는 자신의 방이 있고, 지하에는 사람들이 내려와 커피를 마시던 오래된 다방의 기억이 있었다. 개인의 방과 사람을 만나는 카페 사이에 무엇을 놓으면 좋을지를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문학으로 시선이 이어졌고, 그중에서도 시가 가장 잘 어울렸다.
소설 한 권을 읽기 위해서는 비교적 긴 시간이 필요하지만 시 한 편은 짧은 시간에도 만날 수 있다. 혼자 읽을 수도 있고 누군가와 나눌 수도 있으며, 같은 문장을 읽어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기억과 감정을 가져갈 수 있다.
그래서 지하 카페의 콘셉트를 ‘시집’으로 정했다.
‘시집’이라는 이름을 정하고 나니 카페를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졌다. 공간 전체를 하나의 시집이라고 생각하면 메뉴는 시집 안에 들어 있는 각각의 작품이 될 수 있고, 손님이 주문하는 행위는 그날 자신이 읽게 될 한 페이지를 선택하는 과정처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카페 곳곳에 시를 붙여놓거나 벽을 문장으로 가득 채우는 방식은 원하지 않았다. 문학을 콘셉트로 만들었다고 해서 공간 전체가 문학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오히려 손님에게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아주 작은 장치를 만들었다.
음료를 주문하면 컵받침과 함께 시 한 편이 나오도록 한 것이다.
커피나 차 한 잔을 주문한 사람 앞에 음료와 함께 짧은 시가 놓였다. 손님이 시를 선택하는 방식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성격을 분석해 그 사람에게 어울리는 시를 골라주는 것도 아니었다. 어떤 시가 자신에게 도착할지는 미리 알 수 없었고, 손님은 우연히 한 편의 시와 만나게 되었다.
그 작은 우연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만들었다.
어떤 사람은 시를 읽다가 마치 지금의 자신에게 필요한 문장 같다며 오래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사진을 찍어 가져갔다. 어떤 손님은 함께 온 사람에게 시를 읽어주었으며, 물론 별다른 관심 없이 컵받침처럼 사용하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 모든 반응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문학적인 공간을 만든다고 해서 그곳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문학을 좋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바카라이 있다고 반드시 읽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시가 놓여 있다고 반드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좋은 공간은 자신의 생각을 보여주면서도 그것을 경험할 것인지 말 것인지까지 손님에게 맡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집’ 카페에서 시 한 편을 음료와 함께 내놓은 이유도 사람을 문학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커피를 마시는 평범한 시간에 예상하지 않았던 문장 하나가 잠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시를 읽고 자신의 상황과 연결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시보다 커피에 집중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몇 달 뒤 우연히 그 종이를 발견하면서 그날의 카페를 떠올릴 수도 있다. 공간기획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가운데 하나의 반응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있다.
나는 이때 브랜드와 공간에 대해 또 하나를 배웠다. 콘셉트가 강하다는 것은 공간 전체에 메시지를 크게 써놓는 것과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작은 경험 하나가 공간의 생각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
이 프로젝트에는 서로 다른 시대의 시간이 겹쳐 있었다. 오래된 여관이라는 건물의 기억이 있었고, 지하에는 과거의 다방이 남아 있었으며, 그 위에 새로운 여성 전용 셰어하우스와 카페가 들어왔다.
나는 그 과거를 완전히 지우고 새것을 만들기보다 새로운 사용방식을 연결하고 싶었다.
누군가가 잠시 묵고 떠나던 여관의 방은 한 사람이 자신의 일상을 꾸려가는 ‘자기만의 방’으로 바뀌었고, 오래된 다방이 있던 지하는 다시 사람들이 내려와 커피를 마시는 카페가 되었다. 그리고 두 공간 사이를 연결하는 언어로 문학을 선택했다.
위층의 문학이 ‘방’이었다면 아래층의 문학은 ‘시’였다.
한쪽에서는 자신의 시간을 보호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우연한 문장을 만난다는 구조였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공간들이었지만 ‘한 사람이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장소’라는 생각에서는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공간의 콘셉트는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실제 동선과 가구, 서비스와 작은 경험으로 번역될 때 비로소 콘셉트가 공간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공간을 기획하면서 문학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인테리어로 옮길 수도 없고, 시의 의미를 가구나 벽지로 완전히 표현할 수도 없다.
다만 문학이 던진 질문을 공간의 방식으로 다시 묻는 것은 가능하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여러 사람과 함께 살면서도 자신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공간은 무엇인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짧은 시간에 낯선 문장 하나를 만난다면 어떤 경험이 생길 수 있는지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방과 옥상, 카페와 컵받침이라는 실제 요소로 번역할 수 있다.
좋은 공간기획은 거대한 메시지를 만드는 일보다 이런 번역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을 사람이 앉고 걷고 마시고 머무르는 경험으로 바꾸는 것이다.
미아동의 오래된 여관을 기획하면서 나는 한 건물 안에 두 종류의 ‘자기만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위층에서는 문을 닫고 자신의 방에 머무를 수 있고, 지하에서는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우연히 한 편의 시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하의 카페를 ‘시집’이라고 불렀다.
시집을 펼치면 어느 페이지에서 어떤 문장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듯, 그 카페에서도 사람들은 커피 한 잔과 함께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 한 편을 받았다. 그 문장을 특별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간은 어느 쪽도 요구하지 않았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공간에도 문학과 비슷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은 문학이 독자에게 하나의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들어갈 여백을 남기듯, 좋은 공간 역시 운영자의 이야기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곳에 들어온 사람이 자신의 방식으로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야 한다.
그 여백이 생겼을 때 비로소 공간은 단순한 인테리어를 넘어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다시 읽힐 수 있는 이야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