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바스키아》로 읽는 커피의 표현과 창조
우리는 창조라는 말을 들으면 세상에 없던 무엇인가가 갑자기 등장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발명하거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전혀 새로운 것을 꺼내놓아야 비로소 창조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은 대부분 완전한 무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던 재료와 이미지, 언어와 경험이 이전과 다른 관계를 맺는 순간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지고, 사람들은 그 낯선 질서를 창조라고 부른다.
장 미셸 바스키아의 작품은 이 사실을 매우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화가 줄리언 슈나벨이 연출한 영화 《바스키아》는 뉴욕의 거리에서 작업하던 젊은 바스키아가 1980년대 미술계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제프리 라이트가 바스키아를 연기하고 데이비드 보위가 앤디 워홀을 연기한 이 영화에서 흥미로운 것은 한 젊은 예술가가 유명해지는 과정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이 바라본 세계를 어떻게 독특한 언어로 바꾸어내는가에 있다.
바스키아의 화면에서는 그림과 문자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단어와 숫자, 인체와 해부학적 이미지, 왕관과 화살표 같은 기호들이 선과 색 사이로 들어오고, 문자 역시 작품을 설명하는 보조수단이 아니라 화면을 구성하는 하나의 시각적 재료가 된다. 그의 노트에서도 시의 파편과 언어유희, 개인적인 관찰과 스케치가 끊임없이 섞이면서 문자와 이미지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그가 단어를 지우면서 오히려 더 보이게 만든다고 설명한 유명한 말 역시 이런 방식을 잘 보여준다. 보통 우리는 무엇인가를 지우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바스키아에게 지움은 삭제가 아니라 강조의 방식이 된다. 가려졌기 때문에 오히려 무엇이 적혀 있는지 궁금해지고, 관객의 시선은 그 단어 위에 더 오래 머문다.
그는 새로운 알파벳을 발명하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는 문자와 이미지, 기호를 이전과 다른 관계 속에 배치했고, 바로 그 관계가 바스키아라는 하나의 독특한 시각언어를 만들었다.
창조의 중요한 원리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바스키아의 그림이 새롭게 보였던 이유는 이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색과 선, 문자를 처음 발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자도 이미 있었고 그림도 있었으며, 숫자와 왕관, 해부학적 이미지와 낙서 역시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그 요소들이 그의 화면 안에서 충돌하고 반복되고 지워지며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은 이전과 달랐다.
그 차이가 하나의 언어를 만들었다.
언어 역시 단어의 개수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몇 개의 단어도 어떤 순서와 관계로 배열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문장이 되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화자와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음악도 새로운 음을 발명해야 새로운 음악이 되는 것은 아니며, 제한된 음을 가지고도 바흐와 재즈, 록과 미니멀리즘은 서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왔다.
그렇다면 창조는 새로운 재료를 계속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서 이전에는 없었던 관계와 질서를 발견하는 능력에 더 가깝다.
나는 이 지점에서 커피를 생각한다.
커피를 만드는 기본적인 재료 역시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생두가 있고 열이 있으며, 물과 분쇄, 시간과 온도가 있고, 그것을 감각하는 인간의 미각과 후각이 있다. 그런데 같은 요소를 가지고도 우리가 만나는 한 잔은 놀라울 만큼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생두의 품종과 생산지, 재배환경과 가공방식에 따라 출발점이 달라지고, 로스팅에서 열과 시간을 어떻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그 가능성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 같은 원두를 사용하더라도 물의 조성과 분쇄도, 추출시간과 온도, 농도와 비율의 관계가 달라지면 한 잔의 인상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커피의 창조 역시 계속해서 새로운 물질을 더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요소들의 관계를 다르게 구성하면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표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커피의 맛을 언어에 비유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 잔의 커피에는 단맛과 산미, 쓴맛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향과 질감, 온도와 후미, 입안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시간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변화가 함께 움직이고, 우리는 그 관계 전체를 하나의 맛으로 받아들인다.
커피를 설명할 때 흔히 재스민이나 복숭아, 초콜릿이나 견과류 같은 향미 단어를 사용하지만, 커피의 언어를 단순히 이런 표현의 목록과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향이 존재하는가뿐 아니라 그 향이 다른 감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이기 때문이다.
같은 재스민을 떠올리게 하는 향이라도 밝은 산미와 투명한 단맛, 가벼운 질감과 만나면 매우 산뜻한 인상을 만들 수 있고, 다른 구조의 단맛과 질감 속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느껴질 수 있다. 향미 하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새로운 커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여러 감각요소가 하나의 구조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한 잔은 자신만의 표현을 갖게 된다.
그래서 좋은 커피를 만든다는 것은 향미 항목을 많이 만들어내는 일보다 감각의 관계를 구성하는 일에 더 가깝다.
바스키아에게 문자와 선, 색과 여백이 표현의 재료였다면 커피에서는 산미와 단맛, 향과 질감, 온도와 후미가 표현의 재료가 된다. 각각의 요소가 얼마나 강한가 보다 어느 것이 먼저 나타나고 무엇이 그것을 받쳐주며, 마지막에 어떤 인상으로 정리되는지가 한 잔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커피는 재료의 목록이 아니라 하나의 문장이다.
여기에서 창조의 수준을 조금 더 나누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것과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카페에서 전에 없던 음료를 하나 개발하거나 기존의 라테에 새로운 재료와 가니시를 더하면 새로운 메뉴가 만들어진다. 그것 역시 분명 창작이지만, 대체로 이미 존재하는 카페와 음료의 문법 안에서 이루어지는 창작이다.
형식의 변화는 그보다 조금 더 깊은 수준에서 일어난다.
새로운 형식은 무엇을 만들 것인가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표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기준 자체를 확장한다.
바스키아의 의미도 독특한 그림 몇 점을 남겼다는 데만 있지 않다. 문자와 기호, 역사와 거리문화, 인체와 상품, 개인적 기억과 슬롯적 이미지를 한 화면에 충돌시키면서 회화가 무엇을 담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스페셜티커피의 등장을 이와 비슷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도 있다.
스페셜티커피가 중요했던 이유는 단순히 이전보다 맛있는 커피가 등장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커피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한때는 어느 나라에서 생산된 커피인지 정도로만 구분하던 것을 지역과 농장, 생산자와 품종, 가공방식까지 더 세밀하게 바라보기 시작했고, 강하게 볶은 커피의 공통적인 향 뒤에 가려져 있던 개별적인 산지와 품종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려 했다. 로스팅은 단순히 생두를 갈색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재료의 특성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가 되었고, 커핑과 센서리 언어는 막연하게 느껴지던 맛의 차이를 비교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보면 스페셜티커피의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맛 한 가지를 추가한 것이 아니라 커피를 읽고 표현하는 문법의 범위를 넓혔다는 데 있다.
아이템이 기존 문법 안에서 새로운 문장을 만드는 일이라면, 형식의 변화는 이전에는 만들기 어려웠던 문장까지 가능하도록 문법 자체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그렇다면 커피에서 ‘새로운 맛을 만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로스터가 생두에 존재하지 않던 향을 마음대로 만들어낸다는 뜻은 아니다. 커피는 농산물이고, 생두에는 품종과 재배환경, 수확과 가공을 통해 형성된 물리적·화학적 조건이 존재한다. 로스팅과 추출은 그 가능성을 변화시키고 표현하지만 무한한 자유를 가진 창조행위는 아니다.
오히려 바로 그 제한이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화가는 캔버스라는 물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고, 음악가는 사용할 수 있는 음과 시간 안에서 작업하며, 작가는 이미 존재하는 언어를 가지고 문장을 만든다. 그런데 인간은 제한된 재료 안에서도 셀 수 없이 많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커피도 마찬가지다.
좋은 로스터는 생두에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내기보다 그 재료 안에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열과 시간의 관계를 조절하면서 그것을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같은 생두에서도 어떤 산미를 얼마나 투명하게 보여줄 것인지, 단맛과 향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지, 질감과 후미를 어느 방향으로 정리할 것인지에 따라 한 잔의 인상은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맛이 반드시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향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에 있었지만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던 특성이 새로운 방식으로 드러나거나, 익숙한 향과 맛이 서로 다른 관계를 만들면서 이전과 다른 인상을 주는 것 역시 창조라고 볼 수 있다.
바스키아가 익숙한 단어를 지움으로써 오히려 더 강하게 보이게 만들었던 것처럼, 커피에서도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보다 특정한 요소를 덜어내거나 관계를 바꾸면서 이전에는 숨어 있던 특징을 선명하게 만들 수 있다.
좋은 창조는 언제나 더 많은 것을 집어넣는 데서 생기지 않는다.
이미 존재하는 것을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일에서도 시작된다.
우리는 창조를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경향이 있다. 천재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내고, 평범한 사람은 기존의 것을 반복하기만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스키아의 작업을 자세히 바라보면 창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의 화면에는 거리에서 보았던 기호와 광고, 역사와 음악, 스포츠와 해부학, 인종과 돈, 권력과 개인적인 기억의 흔적이 뒤섞여 있다. 그는 세상에 없던 재료를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보고 읽고 경험한 세계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배열했다.
그 결과 우리는 그 작품을 보면서 다른 사람의 그림과 구분되는 ‘바스키아의 언어’를 느낀다.
창조의 힘은 바로 거기에 있다.
인간의 창조는 반드시 무에서 유로 이동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유에서 이전과 다른 유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더 가깝다. 기존의 것을 그대로 반복하면 복제가 되지만, 기존 요소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일관된 방식으로 조직하면 창조가 된다.
결국 중요한 것은 재료가 얼마나 새롭냐가 아니라 그 재료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것을 관계 맺게 하는 방식이 얼마나 새로운가이다.
커피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생두는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로스팅과 추출 역시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품종과 산지, 가공과 향미를 다른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면서 커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모습으로 나타났다.
재료가 바뀐 것이 아니라 재료를 읽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다.
스페셜티커피가 만들어낸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스키아의 작품 앞에서 우리는 단순히 그가 그림을 잘 그렸는지만 묻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의 작품은 다른 사람의 그림과 다르게 느껴지는지 생각하게 된다.
왕관과 해부학적 이미지, 지워진 단어와 반복되는 숫자, 거친 선과 화면의 여백이 여러 작품을 통과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개별 작품 하나를 넘어 반복되는 선택이 축적되면서 ‘바스키아답다’는 감각이 생긴다.
커피에도 이런 차원이 필요하다.
기술적으로 정확한 커피와 자신만의 언어를 가진 커피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좋은 생두를 구입하고 좋은 장비를 사용하며, 유명한 로스터의 프로파일을 참고하고 정교한 추출기술을 적용하면 상당히 완성도 높은 커피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자신의 표현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표현은 반복되는 선택에서 만들어진다.
어떤 생두를 선택하고, 그 생두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바라보며, 어느 정도의 산미와 단맛을 살리고 어떤 질감과 후미를 선호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여러 커피에서 반복될 때 하나의 관점이 생긴다. 그 관점이 오랜 시간 축적되면서 로스터와 카페는 자기만의 언어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모든 커피가 기괴하거나 낯설어야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독창성과 낯섦은 서로 다른 개념이다.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해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은 쉽게 스타일이 될 수는 있어도 깊은 언어가 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익숙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다시 바라보고,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준으로 반복해서 선택할 때 더 지속적인 자기다움이 만들어진다.
바스키아도 회화라는 형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선과 색, 문자와 인간의 형상처럼 이미 회화와 시각문화 안에 존재하던 요소를 가지고 자신의 관계를 만들었다.
스페셜티커피 역시 커피를 버리고 새로운 음료로 변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커피나무의 씨앗에서 시작해 볶고, 갈고, 물로 추출한다.
달라진 것은 그 안에서 무엇을 볼 수 있고 무엇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였다.
언어가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이미 알고 있는 세계를 설명하는 데만 있지 않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이전에는 구분하지 못했던 차이를 보기 시작하고, 결국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커피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쓰다’, ‘진하다’, ‘고소하다’ 정도로만 느꼈던 한 잔에서도 향과 산미, 단맛과 질감의 차이를 세밀하게 구분하기 시작하면 이전과 같은 커피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농장과 품종, 가공과 로스팅이라는 정보를 이해하게 되면 맛은 더 이상 우연한 감각에 머물지 않고 자연과 사람, 기술의 결과로 읽히기 시작한다.
새로운 커피 언어는 커피에 없던 세계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했지만 우리가 충분히 보지 못했던 차이를 발견하도록 만든다.
이 점에서 새로운 맛과 새로운 언어는 서로 닮아 있다.
새로운 언어가 새로운 생각을 가능하게 하고 이전에는 구분할 수 없었던 세계를 보게 하듯, 새로운 향미의 표현은 우리가 커피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각의 범위를 넓힌다.
좋은 커피의 창조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맛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데 있지 않다. 이미 한 알의 생두 안에 존재하는 가능성을 읽고, 그것이 이전과 다른 관계 속에서 더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드는 데 있다.
바스키아가 기존의 문자와 이미지, 역사와 개인적인 기억을 자신의 방식으로 조직해 이전에는 없었던 시각언어를 만들었듯, 커피 역시 익숙한 재료와 기술 안에서 새로운 감각의 언어를 계속 만들어갈 수 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신비한 기적이라기보다,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이전과 다르게 바라보고 그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 인간의 능력에 가깝다.
그리고 그런 창조가 한 번의 독특한 작품이나 한 잔의 특별한 커피에 머물지 않고 반복 가능한 방식과 사고의 틀로 발전할 때, 그것은 하나의 형식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표현의 길을 열어준다.
스페셜티커피가 커피문화에 남긴 중요한 변화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전에 없던 커피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마시고 있던 커피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