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스와 본질, 한 알의 커피콩에서 시작된 세계의 확장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은 ‘태초에’라는 말로 시작하고, 여기서 말씀으로 번역된 그리스어가 로고스(Logos)다. 로고스는 일반적으로 말과 언어, 이성과 원리 같은 의미를 지니지만, 요한복음에서 로고스는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나 세계를 설명하는 추상적 원리에 머물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이었으며,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선언되는 근원적 말씀이고, 이후에는 육신이 되어 인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다.
대학교 시절 나는 이 구절을 자주 생각했다. 당시 내가 로고스의 신학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현상 뒤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과 질서가 있다는 생각에 오래 머물곤 했다. 세계는 셀 수 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져 있지만 그 다양성이 아무런 중심도 없이 흩어져 있는 것은 아닐 것이며, 눈앞에 나타난 결과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시작과 구조를 이해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그것을 ‘본질’이라는 말로 이해해 왔다.
여기서 말하는 본질은 사물 안에 숨어 있는 하나의 신비한 물질이나 모든 것을 하나로 환원하는 절대적인 답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형태로 변해도 그 대상의 방향을 붙잡아주고, 새로운 것이 계속 만들어질 수 있도록 가능성을 제공하는 중심에 가깝다. 건물에서 외관보다 기초에 가깝고, 나무에서 눈에 보이는 가지와 열매보다 그것들을 계속 자라게 하는 뿌리에 가까운 개념이다.
중요한 것은 본질이 변화의 반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의 뿌리에서 수많은 가지와 잎이 자라고, 하나의 문법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장이 계속 만들어지듯 단단한 중심은 표현의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생각해 온 본질은 고정된 결론이라기보다 계속해서 새로운 형식을 낳는 생성의 기반이었다.
이 생각은 훗날 노엄 촘스키의 언어학을 접하면서 조금 더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되었다. 생성문법은 인간이 이미 들었던 문장을 단순히 기억하고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제한된 수의 원리와 규칙을 이용해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문장까지 만들어내고 이해할 수 있다는 인간 언어의 창조성을 설명하려 했다. 촘스키가 빌헬름 폰 훔볼트의 표현을 인용하며 널리 알린 ‘유한한 수단의 무한한 사용’이라는 말도 이 언어적 창조성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물론 축제를 언어학 이론으로 그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개념은 내게 하나의 사고방식이 되었다. 무엇인가를 크게 확장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많은 것을 늘어놓기보다 서로 다른 형식을 계속 낳을 수 있는 단단한 중심을 찾아야 하며, 중심 없는 확장은 규모를 키울 수는 있어도 정체성까지 깊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축제도 마찬가지다.
부스를 더 많이 만들고 공연을 늘리며 체험 프로그램을 추가하면 외형적인 규모는 커질 수 있지만, 각각의 프로그램이 왜 한 축제 안에 있어야 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행사는 매년 다시 조립해야 하는 이벤트에 머물 가능성이 크다. 전년도에 인기가 있었던 것을 반복하고, 그해 유행하는 콘텐츠를 하나씩 추가하다 보면 프로그램의 수는 늘어나지만 축제 자체의 문화는 축적되지 않는다.
반대로 중심이 분명한 축제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정체성을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다. 교육으로 확장되어도 같은 질문에서 출발하고, 포럼과 대회, 공연과 외교로 형태가 달라지더라도 각각의 프로그램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질은 변화를 막는 울타리가 아니라 변화가 길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중심이라는 생각은 훗날 세계커피콩축제를 기획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대학원에서 커피학을 공부하던 시절 교수님들과 한국의 커피문화와 커피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한국의 커피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고 도시의 곳곳에는 카페가 늘어났으며, 커피는 일부 전문가의 취미를 넘어 일상적인 음료가 되어 있었다. 언론에서 한국을 ‘커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표현도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그러나 시장이 커진다고 해서 그 문화를 이해하는 학문과 담론까지 같은 속도로 깊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커피를 역사와 농업, 과학과 감각, 경제와 문화라는 복합적인 대상으로 탐구할 수 있는데도 국내의 일부 연구는 기존의 연구주제를 조금씩 변형하거나 이미 알려진 결론을 다른 표본으로 반복 확인하는 수준에 머무르기도 했다. 커피 그 자체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고, 커피를 독자적인 학문적 대상으로 넓혀가기보다는 학위를 위한 연구가 먼저 보이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여러 커피행사를 바라보면서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꼈다. 커피축제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현장에 가면 원두와 장비, 음료와 디저트, 각종 상품을 판매하는 부스가 행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좋은 상품을 소개하고 거래하는 일은 커피산업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판매가 행사의 거의 전부가 된다면 그것은 축제와 박람회, 소비 장터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수님들과 자주 나눈 질문이 있었다.
한국의 커피시장은 이토록 커졌는데, 커피가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떤 자연과 사람의 시간을 거쳐 한 잔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축제는 충분한가. 커피축제의 수많은 프로그램을 하나의 문화로 묶어줄 중심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완성된 한 잔에서 거꾸로 올라가야 했다.
카페에서 손님에게 건네지는 커피는 긴 과정의 마지막 장면이고, 그 이전에는 추출과 로스팅이 있으며, 생두의 유통과 선별, 가공과 건조, 수확과 재배가 존재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품종과 토양, 기후와 생태환경이 있고, 그 모든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물질이 계속 중심을 통과하고 있었다.
그것이 커피콩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커피콩이라고 부르는 것은 콩과식물의 콩이 아니라 커피체리 안에 있는 씨앗이다. 전문가의 언어에서는 생두와 원두를 구분해 부르지만, ‘커피콩’이라는 표현은 대중에게 훨씬 직관적으로 커피의 원재료와 출발점을 떠올리게 한다.
커피의 본질을 하나의 씨앗으로 모두 환원할 수는 없다. 커피에는 자연과 인간, 농업과 노동, 과학과 기술, 역사와 문화가 함께 들어 있고, 어떤 하나의 물질만으로 그 복잡한 세계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축제의 중심을 하나의 상징으로 압축해야 한다면 나는 커피콩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알의 커피콩에는 품종과 유전적 특성이 있고, 그것이 자란 지역의 기후와 고도, 재배환경의 영향이 축적된다. 생산자가 어떤 열매를 선택해 언제 수확했는지, 수확한 체리를 어떻게 선별하고 가공했는지에 따라 이후의 가능성도 달라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두가 로스터에게 전달되면 열을 통해 새로운 향미가 형성되고, 다시 바리스타가 물과 시간의 조건을 조절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마시는 한 잔이 만들어진다.
한 잔의 커피는 어느 한 사람의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와 중남미, 아시아를 비롯한 여러 생산지에서 시작된 자연과 노동이 무역과 물류를 거쳐 소비국으로 이동하고, 로스터와 바리스타의 손을 지나 마지막으로 소비자의 감각에 도착한다.
따라서 커피축제가 커피라는 세계를 온전히 보여주려면 카페와 머신, 로스터와 바리스타만을 중심에 세워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커피가 실제로 자라는 나라와 농장,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산자와 그들의 문화가 함께 보여야 비로소 한 잔의 앞부분까지 축제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이 생각에서 ‘세계커피콩축제’라는 이름이 나왔다.
‘세계’라는 말은 행사 규모가 크다는 의미보다 커피콩 자체가 이미 세계를 연결하는 물질이라는 뜻에 가까웠고, ‘콩’이라는 말은 그 거대한 세계가 시작되는 가장 작고 직관적인 중심을 뜻했다.
그래서 세계커피콩축제라는 이름은 단순한 수식이 아니라 축제의 구조를 규정하는 선언이었다.
완성된 음료에서 시작하기보다 그 음료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먼저 바라보겠다는 선언이었다.
시흥에서 실제 축제를 기획하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도 커피 생산국의 농장과 대사관을 초청하는 일이었다. 커피콩을 축제의 중심으로 정했다면 그 콩을 실제로 생산하는 사람과 나라가 축제의 주변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산국의 농장이 자신들의 커피를 직접 소개하고, 각국 대사관과 관계자들이 자국의 커피산업과 문화를 시민들에게 알리며, 한국의 커피 전문가와 소비자가 그 커피를 한자리에서 경험하는 구조를 만들고 싶었다.
그 구상은 실제 축제의 모습으로 이어졌다.
생산국의 농장 관계자들이 시흥을 찾고, 커피 생산국의 대사와 외교 관계자들이 행사에 참여하면서 한 알의 커피콩을 매개로 농장과 도시, 생산국과 소비국, 전문가와 시민이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축제가 일종의 작은 외교무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외교가 반드시 국가 정상과 정부 관계자가 만나는 국제회의장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농산물과 문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다른 나라의 시민에게 직접 소개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는 일 역시 넓은 의미에서는 문화적 교류와 공공외교의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커피는 이런 관계를 만들기에 흥미로운 매개다.
우리는 매일 커피를 마시지만 자신이 마시는 커피가 어느 나라에서 왔으며 그곳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축제는 평소에는 잔 뒤에 가려져 있던 생산국과 생산자를 앞으로 불러내고, 소비자가 맛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커피가 자란 장소와 사람을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든다.
시흥은 커피를 대규모로 생산하는 도시는 아니지만 세계의 생산국과 한국의 커피문화를 연결하는 도시가 될 수 있다. 도시의 경쟁력이 반드시 자신이 직접 생산하는 자원에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며, 서로 멀리 떨어진 가치와 사람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능력 역시 도시의 중요한 문화적 자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계커피콩축제는 커피콩을 중심에 놓았지만 커피콩 자체에만 머무르려는 축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작은 중심이 명확했기 때문에 농업과 과학, 인문학과 예술, 산업과 외교까지 여러 방향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
한 알의 커피콩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자연스럽게 품종과 재배환경, 수확과 가공, 발효와 건조를 알아야 하고, 로스팅과 추출의 과학으로 이동하게 된다. 생산국과 소비국이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를 살펴보면 국제무역과 가격, 지속가능성과 가치배분의 문제를 만나게 되고, 인간이 그 커피를 어떻게 맛보고 기억하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감각과학과 심리, 문화와 철학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작은 씨앗 하나에서 생각보다 많은 질문이 자라나는 것이다.
이 질문은 거북섬 세계커피포럼과 같은 담론의 장으로 확장되었다. 축제가 시민과 함께 커피를 직접 경험하는 공간이라면 포럼은 커피산업의 현재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문제를 토론하는 지적 무대로 기능할 수 있으며, 생산과 유통, 산업과 문화, 도시와 관광을 하나의 커피라는 주제 아래에서 함께 논의할 수 있다.
교육 역시 같은 구조에서 발전했다.
K-커피대학과 여러 교육프로그램에서는 커피를 단순한 추출기술로만 가르치기보다 서로 다른 관점으로 읽으려 했다. 커피인문학에서는 역사와 철학, 인간과 슬롯의 문제를 다루고, 커피문화예술 영역에서는 음악과 문학, 예술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전문적인 교육에서는 로스팅과 추출, 감각평가와 실무를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들은 서로 관계없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한 알의 커피콩을 서로 다른 학문의 언어로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문화예술로의 확장 역시 같은 원리에서 나왔다. 바흐의 《커피 칸타타》가 당시 유럽슬롯에 들어오던 커피와 세대의 갈등을 음악적 풍자로 담아냈다면, 그것을 오늘의 한국슬롯와 지역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 K-칸타타와 같은 새로운 형식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그대로 복제하는 데 있지 않다.
하나의 중심에서 출발하되 시대와 장소에 맞는 새로운 표현을 만들어내는 데 있다. 본질은 옛 모습을 보존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 무엇을 지키면서 무엇을 새롭게 바꿀 수 있는지 알려주는 기준에 가깝다.
세계커피대회 WCC와 K-커피어워드 역시 이런 구조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세계의 농장을 축제에 초청해 좋은 커피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지만, 만남이 매년 반복되는 일회성 이벤트를 넘어 하나의 새로운 가치체계로 이어지려면 생산된 커피를 발견하고 평가하며 소비시장과 연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K-커피어워드에서 세계의 농장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커피를 출품하고 한국의 전문가들이 이를 평가하는 구조를 만든 것도 같은 이유였다.
여기에서 ‘K-커피’는 한국에서 재배된 커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생산된 커피를 한국의 전문가와 소비문화가 만나 해석하고, 그 가운데 의미 있는 커피를 발견해 새로운 시장과 연결한다는 개념에 더 가깝다.
K-문화가 세계의 다양한 요소를 그대로 복제하기보다 한국의 감각과 언어로 다시 구성해 새로운 콘텐츠로 발전시켜 왔듯, 커피 역시 세계의 재료를 한국의 감각과 전문성을 통해 새롭게 읽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이러한 평가가 생산자에게 새로운 위계를 일방적으로 부여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평가의 목적은 한국이 세계의 커피를 재단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품질을 만들어낸 농장을 발견하고 그 가치를 소비시장과 연결하며 생산자에게 더 많은 기회가 돌아갈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야 한다.
그래서 수상 농장과 생산자를 초청해 지속가능한 생산과 거래, 농장의 미래를 논의하는 자리를 만드는 일도 중요했다.
커피콩을 축제의 본질이라고 말한다면 그 콩을 만들어낸 생산자의 삶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좋은 커피문화는 높은 점수와 희귀한 향미를 발견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농장이 다음 수확에도 좋은 커피를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생각할 때 비로소 지속될 수 있다.
축제의 확장은 산업과 전문가에게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청소년이 커피를 배우고 자신의 기술을 겨루는 대회를 만들고, 장애인이 자신의 전문성과 역량을 커피를 통해 보여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시민이 커피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운영한 것도 같은 생각에서 출발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축제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추가된 부대행사가 아니다.
한 알의 커피콩이라는 공통의 출발점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으로 열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청소년에게 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직업과 기술, 세계의 문화와 농업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매개가 될 수 있고, 장애인에게는 자신의 능력과 노동의 가치를 보여주는 직업적 언어가 될 수 있다. 시민에게도 커피는 매일 습관적으로 소비하는 음료에서 벗어나 농업과 과학, 역사와 감각, 세계의 사람을 이해하는 지식의 통로가 될 수 있다.
좋은 축제는 관람객의 숫자를 늘리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행사장에 온 사람을 수동적인 소비자로만 남겨두지 않고, 스스로 배우고 만들고 평가하며 질문할 수 있는 참여자로 바꾸어야 한다. 누군가는 커피를 추출하고, 다른 사람은 맛을 평가하며, 누군가는 생산자의 이야기를 듣고, 또 다른 사람은 새로운 질문을 제기할 때 축제는 상품을 소비하는 행사를 넘어 공동체가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가 된다.
페스티벌은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행사에 붙이는 다른 이름이 아니다.
축제는 한 공동체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드러내고, 그 가치와 기억을 함께 경험하며 다음 시간으로 전달하는 문화적 장치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의 대형무대와 인기 있는 공연, 많은 부스를 준비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축제의 정체성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세계커피콩축제가 지향한 것도 여기에 있다.
처음부터 국가나 대기업이 세계적인 행사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 지역에서 시작된 분명한 철학과 문화가 오랜 시간 축적되고 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결국 도시와 국가를 대표하는 문화자산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흥에서 시작한 세계커피콩축제가 지역축제에만 머물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미 유명한 세계축제의 외형을 흉내 내는 방식으로 성장해서도 안 된다.
시흥에서 시작한 이유와 이 축제만의 구조를 계속 축적하면서 세계와 연결해야 한다.
‘세계’라는 이름은 행사장의 규모나 해외 참가자의 숫자로만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생산자와 국가, 한국의 전문가와 시민이 한 알의 커피콩이라는 중심을 통해 실제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교육과 연구, 대회와 예술, 외교와 거래의 형태로 계속 확장될 때 세계성은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세계적인 축제는 이름 앞에 ‘세계’를 붙인다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참여할 이유가 있고 다른 지역에 제안할 만한 고유한 문화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세계커피콩축제의 시작을 되돌아보면 대학 시절부터 품어왔던 ‘본질’에 대한 관심과 대학원에서 고민했던 커피학과 커피문화의 문제가 하나의 지점에서 만났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요한복음의 로고스와 커피콩을 신학적으로 동일한 차원에 놓을 수는 없다. 기독교 신앙에서 로고스는 단순한 사물의 본질이나 조직의 핵심개념을 훨씬 넘어서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다.
다만 내가 로고스를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배운 태도 하나는 축제를 만드는 과정에도 남아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수많은 현상과 결과를 먼저 늘어놓기보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무엇에 의해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태도였다.
세계커피콩축제에서 그 중심을 커피콩으로 정했다.
커피콩은 단순히 축제 로고에 들어가는 소재나 여러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왜 이런 프로그램이 필요한지를 계속 설명해 주는 출발점이 되었다. 커피콩을 따라가면 생산국과 농장을 만나게 되고, 농장을 바라보다 보면 대사관과 문화교류, 국제적인 관계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생산자의 삶을 생각하면 지속가능성과 거래의 문제를 만나고, 품질을 어떻게 발견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K-커피어워드와 대회가 만들어진다.
커피에 관한 지식을 더 깊게 나누려는 질문에서는 포럼과 교육이 나오고, 커피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문화의 흔적을 따라가면 음악과 문학, 공연과 예술의 프로그램으로 확장된다. 커피를 전문가의 전유물에 머물게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는 청소년과 장애인,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생겨난다.
겉으로 보면 서로 다른 프로그램이지만 출발점은 같다.
한 알의 커피콩이 여러 방향으로 읽히면서 서로 다른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커피콩은 작지만 그 주변에는 놀라울 만큼 넓은 세계가 존재한다. 자연과 농업, 기후와 생태, 생산과 무역, 과학과 기술, 감각과 예술, 국가와 도시, 농장과 시민이 결국 하나의 씨앗을 통해 연결된다.
그래서 우리는 단순히 ‘커피축제’라고 부르지 않고 ‘세계커피콩축제’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완성된 한 잔보다 그 한 잔이 시작된 곳을 먼저 바라보고, 소비되는 상품보다 그것을 생산한 사람과 자연을 함께 보며, 일회성 행사의 규모보다 오랫동안 여러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는 문화의 구조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작을 수 있지만, 그 본질에서 시작되는 가능성까지 작은 것은 아니다. 한 알의 커피콩은 한 잔이 되고, 한 잔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만들며, 그 만남은 다시 교육과 연구, 예술과 산업, 도시와 외교의 관계로 확장될 수 있다.
세계커피콩축제가 지향하는 것은 커피를 많이 판매하는 행사를 만드는 데 있지 않다.
한 알의 커피콩 안에 이미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발견하고, 그 관계를 시흥이라는 도시에서 다시 만나게 하는 데 있다.
결국 우리가 많은 프로그램 속에서 억지로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처음 선택한 하나의 중심에서 여러 가능성이 자연스럽게 자라났다.
바로 그것이 이 축제가 단순한 커피축제가 아니라 ‘세계커피콩축제’여야 했던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