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일 포스티노》와 커피 향미 언어
대학원에서 커피학을 공부하던 시절 ‘커피 스크린 명작연구’라는 강의를 들었다. 언어학을 전공한 교수님과 매주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작품 속 인물과 시대, 공간과 언어를 커피와 현대문화에 연결해 해석하는 수업이었다. 영화 안에 커피가 실제로 등장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한 편의 영화가 인간의 감각과 욕망, 관계와 기억을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지를 읽은 뒤, 그 구조를 다시 커피와 카페의 세계로 옮겨보는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수업은 영화 속에서 커피를 찾는 시간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커피를 새롭게 바라보는 훈련에 가까웠다. 커피를 농업이나 로스팅, 추출이라는 기술적 과정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이 감각을 느끼고 표현하며 타인과 공유하는 문화적 현상으로 읽어보는 방식이었다.
그 수업에서 만난 여러 작품 가운데 특히 오래 마음에 남은 영화가 《일 포스티노》였다.
고전은 단순히 오래 살아남은 작품이 아니다. 특정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그 시대와 함께 의미를 잃지 않고, 시간이 지난 뒤에도 인간의 사랑과 상실, 욕망과 고독을 새롭게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독자가 달라질 때마다 다른 질문을 꺼내놓고,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 처음 마셨을 때 강렬했던 향미보다 시간이 흐른 뒤 더 선명하게 기억되는 한 잔이 있고, 세부적인 맛은 희미해졌는데도 그날의 공간과 함께 있었던 사람, 잔을 들던 순간의 감정은 이상할 만큼 오래 남기도 한다. 그래서 명작 같은 커피를 단순히 자극이 강한 커피라고 말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시간이 지난 뒤에도 어떤 감각과 기억을 다시 불러올 수 있는 커피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한 장면을 통해 오래된 감정을 현재로 불러오듯 커피는 향과 맛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일부를 다시 불러낼 수 있다. 그러나 감각과 기억만으로는 커피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기 어렵다.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구분하고 기록하며, 다른 사람의 경험과 비교할 수 있는 언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일 포스티노》와 커피의 향미 언어가 만난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 루오폴로는 처음부터 시를 이해하거나 자신의 감정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섬에 머물게 된 시인 파블로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배달하면서 시와 은유라는 낯선 언어를 접하고, 그 언어를 통해 자신이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특히 베아트리체를 사랑하게 된 마리오는 자신의 마음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것을 어떤 문장으로 꺼내놓아야 할지는 모른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붙잡아둘 언어가 없는 상태다.
네루다는 그런 마리오에게 완성된 사랑의 문장을 대신 제공하기보다 은유를 가르친다. 은유란 본래 서로 다른 두 대상을 연결하고 그 사이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닮음을 발견하는 방식이다. 바다와 마음, 하늘과 눈동자, 바람과 사랑처럼 직접적으로는 연결되지 않았던 것들이 언어를 통해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다.
따라서 은유를 배운다는 것은 멋있는 표현 몇 개를 암기하는 일이 아니라 세계를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의 마리오는 네루다의 언어를 빌린다. 시인의 표현을 따라 하고, 그의 문장을 자신의 사랑에 가져다 쓰며, 아직 자기 언어가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모방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의 변화다.
마리오는 점차 자신의 섬을 듣기 시작한다. 파도와 바람, 어부들의 움직임과 그물, 종소리와 밤의 소리처럼 이전에도 늘 주변에 있었지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들이 자신의 감각 안으로 들어온다. 처음에는 네루다의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자신의 감각과 언어로 표현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마리오에게 새롭게 생긴 것은 감정이 아니다. 그는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사랑했고, 바다와 섬의 소리를 들으며 살아왔다. 다만 언어를 얻은 뒤에야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었는지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커피를 배우는 과정 역시 이와 상당히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커피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종종 자신에게 좋은 미각이 없다고 말한다. 전문가가 한 잔에서 재스민과 베르가모트, 복숭아와 흑설탕을 이야기하는데 자신에게는 그저 쓰거나 시게만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설명을 듣고 나면 비슷한 느낌이 있는 것도 같지만, 혼자 커피를 마실 때는 무엇을 느꼈는지 제대로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표현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향미 언어를 배우기 전부터 커피의 차이를 어느 정도 경험하고 있다. 어떤 커피는 산뜻하고 깨끗하다고 느끼고, 다른 커피에서는 무겁거나 텁텁한 인상을 받을 수 있으며, 어떤 향에서는 익숙한 과일이나 차, 견과류와 비슷한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그 감각들이 아직 세밀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언어로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다.
“향이 좋다”, “부드럽다”, “시다”, “진하다”라는 표현도 분명 감각의 언어다. 문제는 이런 넓은 표현만으로는 서로 다른 경험을 정확하게 비교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이 말하는 ‘부드러움’이 쓴맛이 약하다는 뜻인지, 산미가 둥글다는 뜻인지, 질감이 가볍고 매끄럽다는 의미인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개인의 느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축적하고 비교할 수 있는 공통의 기준이 부족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향미 언어의 필요성이 생긴다.
커피를 배우는 일은 존재하지 않던 감각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기보다, 이미 느끼고 있던 차이를 더 자세히 관찰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며, 다른 감각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 가깝다.
마리오가 은유를 배우고 나서 비로소 자신이 늘 보아왔던 바다와 섬을 새로운 방식으로 듣기 시작했듯, 커피의 언어를 배운 사람 역시 이전과 같은 한 잔에서 더 많은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언어는 감각을 대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순간적으로 지나가버릴 감각을 붙잡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준다.
어떤 분야든 지식이 축적되기 위해서는 현상을 구분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음악에는 음의 높이와 길이, 리듬과 강약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체계가 있고, 화학에서는 원소기호와 분자식으로 물질의 구조와 반응을 표현한다. 의학에서는 인체와 질병을 구분하기 위한 용어가 사용되며, 건축가는 평면도와 단면도, 구조와 축척의 언어를 이용해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공간을 다른 사람과 공유한다.
물론 전문용어가 많다고 해서 어떤 분야가 자동으로 학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언어가 실제 현상을 구분하고 관찰을 기록하며, 서로 다른 사람의 판단을 비교하고 검증할 수 있도록 만드는 가이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방식으로 경험을 설명한다면 지식은 쉽게 개인의 감상에 머물지만, 어느 정도 공유 가능한 개념과 기준이 생기면 관찰은 기록이 되고 기록은 비교와 연구의 자료가 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커피에도 여러 종류의 언어가 존재한다.
재배에서는 품종과 생육, 기후와 토양, 고도와 수확의 언어가 사용되고, 로스팅에서는 열과 시간, 물리적 변화와 화학반응을 설명하기 위한 언어가 필요하다. 추출에서는 투입량과 추출량, 농도와 수율, 분쇄도와 물의 조성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 여러 과정이 최종적으로 만나는 곳에 감각의 언어가 있다.
어떤 품종을 재배했는지, 체리를 어떤 방식으로 가공하고 건조했는지, 로스터가 열을 어떻게 다루었으며 바리스타가 추출 조건을 어떻게 조정했는지는 결국 한 잔의 향과 맛, 질감에서 감각적 결과로 나타난다.
따라서 커피 향미 언어는 단순히 소비자가 커피를 세련되게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사가 아니다. 재배와 가공, 로스팅과 추출의 결과를 감각적으로 확인하고, 그 결과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공유하는 데 필요한 중요한 도구다.
커피학이 성립하는 데에는 농학과 화학, 물리학과 감각과학, 경제와 문화 등 여러 지식체계가 함께 필요하지만, 최종적으로 한 잔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인간이 경험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 역시 중요한 기반이 된다.
커피를 처음 공부할 때 플레이버 휠을 보면 가장 먼저 수많은 향미 단어에 압도되기 쉽다. 과일과 꽃, 견과류와 코코아, 향신료와 발효의 인상이 여러 범주와 색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좋은 커피를 마시면 그 안에서 반드시 이 단어들을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플레이버 휠의 중요한 역할은 향미 단어의 개수를 늘리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감각이 어떻게 넓은 인상에서 구체적인 차이로 이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처음 커피를 마셨을 때 ‘과일 같다’고 느꼈다고 해보자. 여기에서 조금 더 집중하면 베리류인지 감귤류인지, 말린 과일인지 다른 종류의 과일인지 구분할 수 있고, 다시 경험과 기억을 비교하면서 레몬이나 오렌지, 자몽처럼 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이동할 수 있다.
감각은 처음부터 정확한 단어로 도착하지 않는다.
넓고 모호한 인상에서 시작해 비교와 기억을 통해 점차 구체적인 언어를 찾아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플레이버 휠은 감각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지도에 가깝다.
현재 널리 알려진 플레이버 휠 역시 커피 감각 연구에서 정리된 렉시콘과 연결되어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단순한 디자인 포스터와는 성격이 다르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적힌 모든 단어를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을 넓은 범주에서 조금씩 좁혀가며 보다 구체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
그래서 플레이버 휠을 사용할 때는 정답을 먼저 찾아서는 안 된다.
전문가가 ‘복숭아’라고 말했다고 자신의 감각을 그 단어에 억지로 맞출 필요는 없으며, 휠에 재스민이 있다고 해서 좋은 커피마다 재스민을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실제로 느낀 것이 과일 쪽인지 꽃 쪽인지, 밝은지 무거운지, 익숙한 향인지 낯선 향인지를 먼저 살핀 뒤 조금씩 더 구체적인 언어로 이동해야 한다.
플레이버 휠이 좋은 도구가 되는 순간은 감각을 통제할 때가 아니라, 감각이 길을 잃지 않도록 안내할 때다.
그러나 지도에 지명이 표시되어 있다고 해서 그 장소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블루베리’, ‘갈색 설탕’, ‘꽃향’, ‘발효’ 같은 단어 역시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같은 말을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감각을 떠올릴 수 있다. 한 사람이 기억하는 블루베리는 생과일일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잼이나 음료에서 경험한 향일 수도 있으며, 특정 식재료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권에서는 그 단어 자체가 감각적 기준으로 기능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센서리 렉시콘은 이런 차이를 줄이기 위해 감각의 속성을 정의하고, 사람들이 가능한 한 유사한 기준으로 그것을 확인하고 비교할 수 있도록 만든 도구다. 각각의 감각 특성에 대한 설명과 기준이 제공되면 서로 다른 연구자와 평가자가 동일한 단어를 조금 더 일관된 의미로 사용할 수 있다.
플레이버 휠이 향미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지도라면, 렉시콘은 지도에 적힌 각 지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주는 사전에 가까운 셈이다.
그러나 렉시콘의 목적 역시 커피를 더 복잡하게 말하는 데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사람이 같은 현상을 관찰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언어의 오차를 줄이고, 감각적 경험을 비교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주는 데 있다.
이런 공통의 언어가 만들어지면 감각은 개인의 인상에서 조금씩 연구 가능한 자료로 이동할 수 있다. 특정 품종이나 가공방식에서 어떤 향미 경향이 나타나는지 비교하고, 로스팅 조건이 감각적 결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기록하며, 여러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다른 연구와 비교할 수 있게 된다.
감각이 언어를 얻고, 언어가 일정한 기준을 만나며, 그 기준을 통해 반복적인 관찰이 가능해질 때 경험은 지식으로 축적되기 시작한다.
커피는 한 장소에서 시작하지만 그 장소 안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생산자는 커피를 재배하고 가공하지만 자신이 만든 생두를 실제로 볶거나 마실 사람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수입자와 로스터, 바리스타와 소비자는 서로 다른 국가와 언어,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커피를 두고 협력해야 한다.
생산자는 자신의 커피가 어떤 특징을 가진다고 생각하는지 전달하고, 바이어는 여러 생산지의 커피를 비교하면서 구매를 결정한다. 로스터는 생두가 가진 가능성을 어떤 방향으로 표현할지 판단하고, 바리스타는 최종 추출 결과를 감각적으로 확인한다.
만약 이들이 사용하는 향미의 기준이 완전히 다르다면 정보는 단계마다 끊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공통된 향미 언어는 세계의 커피인들이 서로 협력하기 위한 실질적인 도구가 된다.
하지만 공용어가 필요하다는 말이 모든 사람의 감각을 똑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향미 경험에는 기억과 문화가 깊이 개입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매우 익숙한 과일이나 향신료가 다른 지역의 사람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을 수 있다. 특정 문화권의 식재료와 경험만이 국제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는다면 다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감각과 언어가 주변으로 밀려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커피의 향미 언어는 완성되어 고정된 체계라기보다 새로운 경험과 문화가 들어오면서 계속 수정되고 확장될 수 있는 열린 언어여야 한다.
표준화가 필요한 것은 서로의 감각을 비교하기 위해서이지, 모든 사람이 같은 기억과 표현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공통 언어는 개인의 감각을 지우지 않고, 서로 다른 감각이 만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 바닥을 만든다.
대학원 첫 학기 오리엔테이션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학과장님은 커피를 공부하려면 플레이버 휠과 센서리 렉시콘을 가까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많은 커피 서적을 읽는 일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느낀 향과 맛을 구분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할 기본 언어가 없다면 여러 지식을 서로 연결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처음에는 그것을 커피 전문가가 되기 위해 외워야 하는 일종의 용어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 커피를 마시면서 플레이버 휠과 렉시콘을 반복해서 살펴보자 생각이 달라졌다. 향미 단어를 많이 말하는 능력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더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 감각을 다른 사람의 경험과 비교하며, 왜 그런 표현을 선택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직원을 교육할 때도 이 두 도구를 활용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미각을 믿지 못하던 직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시다”거나 “진하다”라고 표현하던 커피의 차이를 조금씩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산미가 날카롭고 어떤 산미가 과일의 단맛과 함께 느껴지는지, 추출 조건이 달라졌을 때 질감과 후미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변화는 단순히 사용하는 단어가 많아졌다는 데 있지 않았다.
자신이 매일 수행하던 추출을 이전보다 세심하게 관찰하기 시작했고, 결과가 달라졌을 때 무엇이 변했는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게 되었다.
언어가 생기자 반복적인 업무가 관찰과 판단의 과정으로 바뀌었다.
학문을 배운다는 것은 결국 정보를 많이 소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현상을 더 정확하게 질문하고, 그 질문을 다른 사람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언어를 얻는 일이기도 하다.
커피의 향미 언어가 평가표와 연구실에만 머문다면 소비자에게는 여전히 낯선 전문용어일 수 있다.
그러나 카페에서는 그 언어가 메뉴와 설명, 서비스와 공간의 경험으로 번역된다.
예를 들어 산뜻하고 깨끗한 커피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카페와 단맛과 질감, 편안한 향미를 강조하는 카페는 서로 다른 메뉴구성과 서비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산지와 품종, 가공법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고, 다른 곳에서는 손님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맛의 방향부터 안내한 뒤 관심에 따라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전문적인 언어를 그대로 손님에게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향미 노트는 운영자의 지식을 과시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손님이 자신의 감각을 발견하도록 돕는 안내가 되어야 하며, 직원의 설명 역시 정답을 알려주는 강의보다 손님의 경험을 열어주는 대화에 가까워야 한다.
전문가가 한 커피에서 재스민과 복숭아를 느꼈다고 하더라도 손님은 차나 귤, 어린 시절 먹었던 사탕을 떠올릴 수 있다.
그 경험을 틀렸다고 바로 교정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왜 그런 기억이 떠올랐는지 대화를 이어가고, 공통된 감각적 특징이 무엇인지 함께 살펴볼 수 있다면 향미 언어는 사람의 감각을 위축시키는 권위가 아니라 감각을 확장하는 도구가 된다.
좋은 카페는 공통의 커피 언어를 제공하면서도 개인의 기억과 해석이 들어올 자리를 남긴다.
그때 카페는 커피를 판매하는 공간을 넘어 자신의 감각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감각과 비교해 보는 작은 학습의 공간이 될 수 있다.
《일 포스티노》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시의 언어를 배웠지만 끝내 네루다처럼 말하는 사람으로 남지는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섬에서 자신이 들은 것을 찾기 시작한다.
바다와 바람, 그물과 별, 사람의 목소리와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처럼 언제나 곁에 있었던 것들이 시의 언어를 배우고 난 뒤에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마리오가 네루다의 언어를 버렸다는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언어에서 출발했지만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는 법을 배웠고, 마침내 자신이 경험한 것을 자신의 방식으로 표현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커피 언어를 배우는 과정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처음에는 전문가가 말한 재스민과 베르가모트, 복숭아와 초콜릿을 따라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감각의 기준점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자신이 이전에는 구분하지 못했던 차이를 인식하게 만든다.
하지만 거기에서 멈추면 커피는 계속 다른 사람의 언어로만 존재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넓은 범주의 향과 맛을 자신의 감각으로 구분하고, 산미와 단맛, 질감과 후미가 어떤 관계를 만드는지를 스스로 관찰해야 한다. 더 나아가 생산지와 품종, 가공과 로스팅, 추출의 변화가 한 잔에서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지 자신의 경험과 논리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커피는 외워둔 향미 노트에서 자신의 문장으로 이동한다.
공통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남들과 똑같이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신이 느낀 것을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 위한 과정이다.
커피가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이유를 하나의 요소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커피에는 식물과 농업, 물리와 화학, 감각과 심리, 경제와 역사, 문화와 공간까지 여러 분야의 지식이 얽혀 있으며, 이러한 현상을 연구하고 검증할 방법론과 자료 역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언어는 그 모든 지식을 연결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커피에 관한 경험을 구분하고 기록하며, 서로 비교하고 검증할 수 있는 개념이 없다면 많은 관찰은 개인적인 경험으로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일정한 언어와 기준이 생기면 한 사람이 발견한 차이를 다른 사람이 다시 확인할 수 있고, 그 차이가 왜 나타났는지를 연구할 수 있다.
감각은 언어를 만나 기록이 되고, 기록은 비교를 가능하게 하며, 비교는 질문을 만든다. 그 질문이 실험과 연구로 이어지고, 반복해서 확인된 지식은 다시 교육을 통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가 경험보다 앞서지 않는 것이다.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아무리 많은 은유를 설명해 주어도 마리오가 자신의 섬과 사랑을 직접 경험하지 않았다면 그 언어는 살아 움직이기 어렵다. 커피 역시 플레이버 휠과 렉시콘을 모두 외웠다고 해서 향미를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다양한 커피를 반복해서 맛보고 비교하는 경험이 함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좋은 커피교육은 단어부터 강요하기보다 먼저 향을 맡고 맛을 느끼게 한 뒤, 자신이 받은 인상을 말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표현을 들은 다음 다시 커피를 확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감각이 언어를 만나고 언어가 다시 감각을 더 세밀하게 만드는 순환이 일어날 때 지식은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마리오는 시를 배운 뒤 자신의 삶을 대신 설명해 주는 정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
커피를 공부하는 일도 비슷하다.
커피학은 정답이 적힌 향미 목록을 외우게 만드는 공부가 아니라, 한 잔에서 일어나는 감각적 변화를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그것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질문하며, 그 경험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언어를 얻는 과정이어야 한다.
좋은 커피에는 이미 많은 정보가 들어 있다. 품종과 재배환경, 열매가 익어간 시간과 가공의 흔적, 로스팅의 선택과 추출의 판단이 물질적 특성과 감각적 결과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저절로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커피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커피에 없는 이야기를 억지로 만들어 붙이는 일이 아니다. 이전에는 그저 ‘맛있다’ 거나 ‘시다’고 지나쳤던 한 잔에서 더 많은 차이를 발견하고, 그 차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듣게 되는 일이다.
마리오가 시의 언어를 통해 자신이 살아온 섬을 새롭게 발견했듯, 커피의 언어를 배운 사람은 같은 한 잔에서도 이전에는 들리지 않던 더 많은 이야기를 듣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