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새로운 명명

by채도운

석재는 로고를 보자마자 대번에 표정을 구겼다. 굵은 줄기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좌우로 넓게 펴져 있고, 뿌리는 땅을 움켜쥔 손가락처럼 사방으로 뻗어져 있었다. 마을 어귀에서 수백 년을 버틴 수호목을 본뜬 모양이었다. 그건 바로 지금은 사라진 연희의 법인 회사 로고였다.

“질긴 뿌리네.”

석재의 읊조림을 들은 강은이 물었다.

“이 로고 알아요?”
석재는 휴대전화를 꺼내 목조상 전체를 한 장, 로고를 확대해서 다시 한 장 찍었다.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상관이 있을 수도 있죠.”

강은은 원숭이 상의 발가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은 네 발가락과 달리 새끼발가락은 안쪽으로 휘어져 있었는데 색이 조금 다른 나무가 덧대어져 있었다. 강은도 휴대전화로 열심히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석재는 그런 강은을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공문 한 장도 윗선의 결재 없이는 내보내지 못하는 9급짜리가, 이 판의 사정을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강은은 사진을 찍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예를 들어······ 박연희 씨의 일이라던가.”

석재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멎었다. 그 흔들림을 포착한 강은이 말했다.

“요즘 선자 씨네 정원에는 잘 안 가시죠?”

“······”

“선자 씨가 강연도 많이 하고, 정원을 소재로 그림도 그리고 있답니다. 얼마 전에는 예술인 창작지원사업에도 선정됐고요. 아, 조만간 개인전도 연다고 하더라고요.”
석재의 표정에서 남아 있던 비웃음이 사라졌다.

“물론 언니인 연희씨가 선두에서 기획하고 있고요.”

석재는 선거가 끝난 뒤 흘렀던 미묘한 기류를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했다. 민구에게는 권력이 있었고, 연희에게는 돈이 있었으며, 석재에게는 두 사람이 벌인 일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실행력이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고,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회사와 사람을 내주며 그들을 도왔다. 그러나 석재의 역할에는 끝이 있었다. 실행자를 자신들과 계속 동등한 자리에 올려둘 권력자와 자산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예상하지 못한 일도 아니었다. 그래서 내놓으라는 것을 순순히 내놓았다. 민구가 원한 것이 디지털미디어랩의 수익이었다면, 연희가 원한 것은 컬쳐씨앤씨가 지난 팔 년 동안 쌓아 올린 문화판이었는지도 몰랐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모은 사람들, 기관과 주민을 잇는 관계망, 이미 검증된 기획과 운영 방식. 그 모든 것이 이제 연희의 실적이 되고, 선자의 경력을 떠받치는 기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양털 깎기라는 말, 알아요? 양이 제 힘으로 풀을 뜯고 털을 길러놓으면, 주인이라는 것들이 나타나 제 몫인 양 가위를 들죠. 그래도 양은 죽이지 않아요. 다음 털을 받아야 하니까.”

석재는 사나운 표정을 지은 채 물었다.

“그래서 그쪽이 양이라는 겁니까, 가위를 든 주인이라는 겁니까?”

“음, 따지고 보면 양쪽이랄까요?”
강은은 들고 온 검은 결재판을 가볍게 흔들면서 말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엔 대표님도 양인 것 같은데요?”

석재는 강은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며 물었다.

“내가 양으로 보여?”
석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강은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 시선에는 조롱도 동정도 없었다. 석재는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치솟았던 분노가 갈 곳을 잃은 듯했다.

“9급 공무원 눈에도 그게 보이나 보지?”
“최근 군수와 나란히 사진을 찍고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사람이 박연희 씨라서요.”

강은은 하운시에서 늘 누군가의 뒤에 숨어 일하던 연희가 호해군에 와서는 자기 이름과 얼굴을 드러내려는 이유가 궁금했다. 궁금해하다 보니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사업이라기보다 사람들에게 얼굴을 익히고 이름 앞에 경력을 쌓아가는 긴 정치 기획이었다. 그 과정에서 밀려나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석재였다. 그가 지금껏 해오던 일과 모아놓은 사람들, 만들어놓은 관계가 조금씩 연희 쪽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석재는 잠시 강은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나야 그렇다 치고, 그쪽 털은 누가 깎았는데?”

강은은 대답 대신 들고 있던 결재판을 석재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오른쪽 신발을 벗었다. 석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는 앞에서 양말까지 벗기 시작하자, 그가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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