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은 카페 창가에 앉아 손바닥만 한 문고본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의 서점이 갑작스럽게 문을 닫으면서 미처 팔지 못한 바카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외할아버지의 이름이 붙어 값이 오를 가구 대신 강은에게 돌아온 것은 문고본 몇 상자였다. 그것들은 이제 강은의 재산이었고, 강은은 집을 나설 때마다 한 권씩 가방에 넣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문이 열리고 은하가 들어왔다. 은하는 인사 대신 창밖을 향해 턱을 까딱하며 말했다.
“저건 아직도 걸려 있네. 헤지지도 않나.”
골목 입구를 가로지른 현수막이 바람을 머금고 부풀었다가 축 늘어졌다. 현수막에는 굵은 헤드라인체로 ‘주민 이백 명도 안 되는 골목에 혈세 이백억! 일 인당 일억씩 해 처먹은 도적 마을!’이라고 적혀 있었다. 강은은 읽던 자리에 바카라갈피를 끼우고 바카라을 덮었다.
“현수막이야 걷어내면 그만인데, 사람들 머릿속에 걸린 건 누가 내려줘.”
“선거철만 되면 새로 달리는데,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겠다.”
은하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강은은 고등학생 때부터 현수막을 철거해달라는 민원을 넣고 다녔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은 늘 같았다. 옥외광고물 표시 신고가 적법하게 되어 있고 게시 기간도 남아 있어 철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선거철마다 현수막은 새것으로 바뀌었고, 강은이가 사는 동네는 도적떼가 등장하는 골목, 일명 도적골목으로 통했다. 은하는 가방을 철푸덕 내려놓으며 강은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너는 화가 나도 꼭 그렇게 얌전하게 말하더라.”
“소리 지른다고 저게 떨어지면 나는 진작 성대결절로 병가 냈어. 분노는 짧은 광기니라.”
은하는 도라도 닦는 듯 눈을 감고 앉은 강은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고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초코 케이크와 딸기 케이크를 하나씩, 강은이 늘 마시는 커피까지 주문했다. 자리로 돌아온 은하는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어디까지 썼어?”
강은은 조그만 행성 피규어가 달린 USB를 은하에게 건넸다.
“기증전결로 치면 기역의 첫 획을 겨우 그은 정도랄까. 쉽진 않더라. 어떻게 써도 보고서 같아서.”
은하는 손바닥 위에 USB를 한 번 굴려보았다.
“그게 시작이지. 네가 제일 오래 써온 게 보고서잖아.”
은하는 USB를 노트북에 꽂고 강은이 가져온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초코 케이크가 접시에서 거의 사라지고 커피의 얼음이 반쯤 녹을 때까지 은하는 말없이 화면을 넘겼다.
“그러니까 오씨네 공방을 중심으로 시작한 골목재생사업이 최종적으로 총사업비 이백억 규모로 확정된 거고.”
“응.”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박연희 씨는 사업이 발표되기 전부터 문 닫은 가게들을 사들이고 있었고?”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