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쇠락한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by채도운

“하여간 유약해. 교수씩이나 돼서, 그깟 명예 좀 건드렸다고 툭 죽어버리고.”

연희는 이곳 호해군으로 내려올 때 가져왔다던 백자 다관을 기울였다. 가느다란 찻물이 흔들림 없이 잔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찻상 한쪽에 놓인 태블릿에는 최문호의 얼굴이 실린 기사가 열려 있었다.

“남의 인생은 논문 몇 줄로 제멋대로 재단하면서, 정작 자기 이름에 먹칠 하나 묻는 건 견디지 못하지.”

석재는 연희가 밀어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는 떫은맛이 났다.

“그래도 그 나약함의 덕을 보지 않았습니까.”
“그래, 정말 다행이지.”

연희는 찻상 한쪽에 놓아둔 서류 봉투를 손끝으로 밀어 석재 앞에 놓았다. 봉투 안에는 클립으로 단단히 묶인 두툼한 보고서가 있었다. 표지에는〈마을의 주인은 누구인가 ― 중앙 문화 권력의 하운시 침투와 헤게모니 형성〉이라는 제목과 최문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 인간, 이걸 발표하려고 했더라고.”

석재는 보고서를 펼쳤다. 학술 보고서라기에는 첫 문단부터 지나치게 날이 서 있었다.

‘쇠락한 지역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희망이 아니었다. 정부 예산의 향방을 먼저 아는 중앙의 문화 권력과 자본이 부동산을 선점했고, 문화는 그 가치를 끌어올릴 명분으로 뒤따랐다. 공공사업을 이용한 사적 축적과 지역의 해석권 강탈을 이들은 ’지역재생‘이라고 부른다. 지역을 살린다는 명분으로 중앙 문화 권력과 정치권이 어떻게 쇠락한 지역으로 들어오는지, 그렇게 들어온 권력이 그 지역의 가치와 미래를 어떻게 선점하고 잡아먹는지 나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장은 분노로 시작했고, 뒤따르는 자료들은 서늘했다. 사업 예정지 발표 전후의 토지 거래 내역과 소유권 변동 이력이 날짜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몇 장을 넘기자 같은 장소를 시차를 두고 찍은 사진이 나왔다. 사진 속에는 상가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일 층에는 문구점과 세탁소, 인쇄소 같은 작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었고, 이 층 창가에는 빨래와 화분이 걸려있었다. 장사와 살림이 층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포개진 동네였다. 다음 사진에서 그 집들은 사라지고 같은 자리에 노출 콘크리트 외벽과 통유리로 멋을 낸 가 들어서 있었다. 입구에는 개관을 축하하는 화환이 늘어서고 알록달록한 깃발 아래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마지막 사진은 그로부터 이 년 뒤의 모습이었다. 불이 꺼진 건물 출입문 손잡이에는 굵은 쇠사슬이 감겨 있었다. 석재는 보고서를 읽다 말고 연희를 바라봤다. 연희는 다기를 사랑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다만 연희에게 사랑받는 것들은 견뎌야 할 일이 좀 많은듯했다. 그녀가 다관 뚜껑을 거칠게 닫자 쨍, 백자끼리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학자라는 것들은 참 비겁해. 심사위원 자리는 빠짐없이 꿰차고 앉아 남의 사업에는 점수를 매기면서, 정작 몸을 움직여 일을 벌이는 법은 없지. 입으로 방향을 정하고 손끝으로 당락을 가른 다음, 일이 틀어지면 펜으로 비판하면 끝이란 말이야.”

다음 순간, 연희의 손에 들려있던 찻잔이 벽으로 날아갔다. 백자가 산산이 깨지며 녹색 찻물이 벽과 바닥에 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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