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는 약속도 없이 연구실을 찾아온 남자를 시큰둥하게 쳐다보았다.
“지금 써놓은 원고도 없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의 대표라는 작자는 그보다는 배우라고 소개했을 때 더 쉽게 믿었을 만한 얼굴이었다. 남자는 창의가 대놓고 면박을 주고 있는데도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잘됐네요.”
“뭐가 잘됐다는 겁니까?”
“원고는 저희가 준비할 수 있거든요.”
남자는 창의의 불쾌한 표정까지 예상했다는 듯 곧바로 말을 이었다.
“대필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그동안 발표하신 논문과 강연 자료를 바탕으로 전문 작가가 초고를 작성할 겁니다. 교수님께서는 최종 원고를 감수해주시면 됩니다.”
남자는 가방에서 출판기획서와 계약서를 꺼내 창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기획서 표지에는 「지역소멸 시대의 마을 재생 전략」이라는 가제가 적혀 있었다. 작가가 따로 붙는다는 말과 달리 계약서의 저자란에는 김창의라는 이름만 인쇄돼 있었다. 그 외의 내용은 평범하고 지루했다. 심지어 인세 부분은 비어있었다. 창의는 계약서를 덮으며 속으로 비웃었다. 계약서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한 초짜 출판사인게 뻔히 보였다.
“일단 두고 가세요. 시간 나면 읽어보겠습니다.”
남자는 패기롭게 들어온 것과 달리 순순히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나가기 전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계약서 버리시면 안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습니까?”
창의는 코웃음을 쳤다. 그는 계약서를 다른 서류 뭉치와 함께 서랍에 넣어두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말은 예언처럼 이루어졌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덕의마을로 현장 심사를 가는 날까지만 해도 창의는 속으로 돈을 계산하고 있었다. 심사수당에 출장비까지 더하면 제법 짭짤했다. 제철 굴을 맛보고 잘 꾸며놓은 정원에서 차까지 마실 수 있으니, 하루를 쓰는 대가로는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 그런데 차를 권하는 여자, 박연희가 창의에게 은근한 미소를 건네는 것이 아닌가.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친절했지만 창의와 눈이 마주쳤을 때는 입꼬리가 조금 더 깊어지는 듯했다. 창의는 찻잔을 받아 들며 맞은편을 살폈다. 연희의 옆에는 신석재가 앉아 있었다. 호해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간 사업자라고 했다. 특히 이번 마을 사업에 민관 협력차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던가. 현장 질의응답은 특별한 것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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