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을 온통 쏟은 듯한 컬러풀한 작업실이었다. 물건으로 가득한 바닥에는 러그가 다섯 장이나 겹쳐 깔려있었다. 고양이 무늬부터 무지개색, 꽃과 도형이 어지럽게 뒤섞인 것까지 하나같이 제멋대로였다. 그 한가운데 누워 있는 여자도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카라을 몇 장 넘기다가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하다가 다시 바카라을 집어 들며 영 산만하게 굴었다. 그러다 허기를 느꼈는지 쿠션을 들어 올렸다. 그 틈에서 언제 들어갔는지 모를 초코바 하나가 나왔다. 여자는 초코바를 정신없이 먹은 뒤 손가락에 묻은 초콜릿을 소파 덮개에 쓱 문질렀다. 다시 러그에 드러누운 여자는 제법 두꺼운 바카라을 얼굴 위로 들어 올렸다. 바카라을 받친 팔뚝에 잔근육이 도드라졌다. 바카라은 칼 세이건의「코스모스」였다. 여러 번 펼쳐본 듯 모서리가 닳아 있었고, 바카라장 곳곳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색의 필기가 대화를 주고받듯 이어져 있었다. 잠시 후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삐, 삐삐, 삐삐삐. 여자는 바카라을 내렸다. 사람마다 도어락을 누르는 속도에는 성미가 묻어났다. 성질 급한 엄마는 여섯 자리를 한꺼번에 몰아치듯 삐삐삐삐삐삐 눌렀고, 아빠는 숨넘어갈 정도로 느리게 눌렀다. 하나, 둘, 셋. 비밀번호를 제 나름의 박자로 누르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여자는 바카라을 내던지고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이 열리자 들어온 사람이 두 팔을 벌리며 소리쳤다.
“우주먼지, 은하짱!”
“별의 자녀, 강은찡!”
둘은 부둥켜안으며 요란하게 재회했다. 은하는 포옹을 풀자마자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냉피, 핫독, 군만두 다 있지. 어떤 거부터 조질까?”
“쯧. 아직도 냉동이야? 이것 좀 봐. 내가 뭘 가져왔는지.”
강은은 아이스백을 열어 도시락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통 안에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깐 굴이 가득 들어 있었다.
“미친. 이게 얼마 만에 보는 해산물이야.”
“빨리 소금 가져와. 소금.”
은하가 소금을 가지러 간 사이 강은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바카라을 바라봤다. 오래전 강은과 은하가 함께 읽은 바카라이었다.
강은이 은하를 만난 건 고등학생때였다. 그것도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반 아이들이 졸업사진에서 어떤 포즈를 취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전학생이 온 것이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초등학교 때부터 함께 자랐다. 은하를 싫어해서라기보다 이미 너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에 낯선 아이를 어디에 끼워 넣어야 할지 몰랐다. 아이들은 은하에게 데면데면했고, 은하도 딱히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강은은 점심시간에도 혼자 교실에 남아 두꺼운 바카라을 읽고 있는 은하를 발견했다.
“무슨 바카라이야? 나도 바카라 좋아하는데.”
은하가 표지를 들어 보였다. 박경리의「토지」였다. 무려 스물한 권짜리 대하소설! 강은은 다음 날부터 은하와 함께「토지」를 읽었다. 은하가 한 권을 다 읽으면 강은에게 넘겼고, 강은이 따라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처음에는 반 아이들도 두 사람 곁에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이름을 구분하는 단계에서 절반이 떨어져 나갔고, 서희의 선택이 옳았는지를 두고 두 사람이 논쟁하기 시작하자 나머지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그렇게 바카라 친구가 된 강은과 은하는 나란히 하운대학교에 진학했다. 각자 나름의 이유로 인생을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읽은 바카라이 바로 「코스모스」였다. 한 사람이 바카라을 읽으며 여백에 질문을 적어두면 다음 사람이 그 아래에 답을 다는 식이었다. 우리는 왜 외로움을 느끼는지, 우리 존재의 의미가 있긴 한 건지.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질문들도 많았지만, 서로를 붙들고 일으켰던 시간이었음은 분명했다.
“소금은 이거밖에 없어.”
은하가 내민 건 분홍빛이 도는 돌이었다. 은하의 말로는 언젠가 선물로 받은 히말라야 핑크 소금이라고 한다. 오랫동안 내버려 둔 탓인지 그라인더를 아무리 돌려도 헛돌기만 해서, 통 안에 들어있는 소금을 덩어리째 가져왔다는 말에 강은은 고개를 진지하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탁자 위에 소금 결정을 내려놓고 주먹으로 퍽, 내리쳤다. 그러자 단단한 알갱이가 순식간에 잘게 부서졌다. 은하는 자연스럽게 가루들을 그러모아 도시락통 뚜껑에 부었다. 둘은 허겁지겁 굴을 소금에 찍어 먹었다.
“바다향 죽인다.”
강은은 가방을 뒤적이더니 회심의 한 수처럼 맥주 두 캔을 꺼냈다. 은하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지, 이거지. 바로 이거지!”
은하는 냉동실에서 살얼음이 낀 텀블러 두 개를 꺼냈다. 둘은 맥주를 쪼르륵 따른 뒤 굴을 안주 삼아 마셨다. 한참 먹고 마시고 나니 테이블과 러그 위로 빈 캔이 굴러다녔다. 은하는 기어이 베란다 김치냉장고에 쟁여둔 맥주까지 꺼내왔다. 그동안 은하는 기사 이야기를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가방 깊숙이 넣어둔 강은의 휴대전화가 몇 차례 울렸지만, 모른척했다. 마지막 캔을 딴 뒤에야 은하가 물었다.
“야, 이제 맥주 다 떨어졌어. 슬슬 이야기 좀 해봐”
“뭘?”
“기사 말야.”
“음, 어디서부터 꺼내 볼까.”
강은은 가방에서 검은색 다이어리 하나를 건넸다. 은하는 맥주 캔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수첩을 펼쳤다.
“지독하다. 지독해”
페이지마다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날짜와 시각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중요한 발언 옆에는 ‘현장녹음 03번 파일, 18분 42초부터’ 같은 표시까지 붙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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