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는 자신의 명패가 있는 자리에 앉아서 바카라상 위에 놓인 자료를 들춰보았다. 심사장에 온 평가 위원들은 서로 저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번 자문회의에 이어서 또 뵙네요.”
“아, 그때 말씀하신 연구는 잘 돼가십니까?”
처음 만난 사람들 같지는 않았다. 다른 평가회나 자문회의, 학회에서 몇 번씩 얼굴을 맞댄 모양이었다. 이런 자리가 낯설었던 문호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엉거주춤 일어나 고개를 숙이다가, 이내 자리에 앉아 자료집을 읽는 데 집중했다. 자료집에는 미리 알아보고 왔던 정보들이 있었다. 정각이 되자 담당자가 회의실 문을 닫고 평가 절차를 설명했다.
“이어 위원장은 위원님들 가운데 호선하도록 하겠습니다.”
담당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러 사람의 시선이 한쪽으로 향했다. 그 사람이 앉아 있는 바카라상 위 명패에는 김창의라고 쓰여 있었다. 창의는 의례적인 사양도 하지 않았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뒤에 있던 담당자가 창의의 명패를 위원장석으로 옮겼다. 창의는 자연스럽게 의사봉을 두들겨 회의 시작을 알렸다.
심사가 시작되자 발표가 차례로 이어졌다. 첫 번째 마을은 문을 닫은 폐교를 청년 창업 공간으로 바꾸겠다고 했고, 두 번째 마을은 오래된 수산물 창고를 요리 체험장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세 번째 마을은 방치된 다랑논에 계절마다 꽃을 심어 관광객을 불러들이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사진도, 특산물도, 마을이 처한 사정도 서로 달랐다. 그런데 발표를 듣다 보면 결국 같은 이야기로 모였다. 빈집과 유휴시설을 활용하고, 특산품을 관광상품으로 만들고, 떠난 청년을 다시 불러들여 일자리를 만든다. 주민이 주도하고 행정은 지원하며, 사업비가 끝난 뒤에는 마을기업의 수익으로 자립하겠다는 결론까지 비슷했다. 문호는 의아했다. 이 마을에서만 가능한 일이 무엇인지, 계획대로 되지 않을경우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정작 주민들은 어떤 변화를 감당해야 하는지를 더 말해주면 좋을 텐데. 문호는 평가표와 발표 자료를 번갈아 보다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주민 참여, 청년 일자리, 지역 자원 활용, 사업의 지속 가능성. 평가표가 요구하는 항목들이 이미 정답처럼 주어져 있었다. 마을들이 저마다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문제지에 가장 그럴듯한 답을 적어내고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문호와 달리 다른 평가 위원들은 발표에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발표자가 슬라이드 첫 장을 넘기기도 전에 모두 자료집에만 얼굴을 박고 있었다. 심지어 발표가 끝나기도 전에 평가표를 작성한 사람도 있었다. 이미 자료를 충분히 검토했기 때문일까. 평가 경험이 쌓이면 발표를 듣지 않아도 사업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걸까.
문득 문호는 떨리는 목소리를 느끼곤 발표자와 눈을 맞췄다. 자신을 호해군 한수진 계장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한 듯 안 한 듯 옅은 화장을 하고 짙은 남색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고 셔츠의 깃도 반듯했다. 밤새 발표를 연습한 사람처럼 모든 것이 빈틈없이 정돈돼 있었다. 다만 화면을 넘기는 리모컨을 너무 세게 쥔 탓에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수진은 슬라이드를 넘길 때마다 평가위원석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위원들은 모두 자료집이나 평가표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눈을 맞춰주는 사람이 없자 다음을 시작하는 목소리가 조금 더 흔들렸다. 문호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작은 움직임이 제대로 전해졌는지 발표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발표가 끝나자 문호가 물었다.
“덕의마을에서 실제 마을 주민들이 맡게 될 역할은 무엇입니까?”
동석한 정의재 팀장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사업이 선정되면 현재의 주민협의체를 마을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계획입니다. 굴 양식에 종사하는 주민들은 패각을 세척하고 선별해 공예 재료로 공급하고, 부녀회에서는 굴 음식 체험과 마을 식당을 운영하게 됩니다. 어르신들은 마을 해설과 공예 체험 보조를 맡고, 청년층은 숙박 예약과 온라인 판매, 홍보 업무를 담당할 예정입니다. 여기서 발생한 수익 일부는 마을 공동기금으로 적립하고요.”
막힘없는 답변이었다. 그 뒤로 두어 명이 더 질문했다. 수진과 의재는 준비한 데이터를 보여주기도 하는 등 성실하게 답변했다. 질문이 모두 끝나자 위원장인 김창의가 발표 종료를 알렸다.
“수고 많았습니다. 퇴장하셔도 됩니다.”
발표자들이 나가자 창의가 말헀다.
“평가표 작성 시간은 오 분 드리겠습니다.”
평가위원석에서 다시 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몇몇 위원은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 이미 작성한 평가표를 뒤집어놓기도 하고, 누군가는 다음 후보의 자료집을 살피고 있기도 했다. 문호는 자신의 평가표를 내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호는 사실 덕의마을을 간 적이 있었다. 처음 덕의마을 이름을 들었던 건 출판계약을 맺던 날이었다. 패각이 쌓인 마을을 연구자들 사이에서 ‘하얀 무덤’이라고 부른다는 문호의 말에 출판사 대표는 이렇게 말했었다. 아직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을 무덤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그 말이 자꾸만 걸리던 차에 마을사업의 평가위원으로 위촉되었고, 덕의마을이 명단에 있는걸 보게 되었다. 때마침 인근에서 강연이 있던 날, 문호는 돌아가는 길을 굳이 틀어 덕의마을로 향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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