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런게 공무원일까?

by채도운

채미는 상자의 찌그러진 모서리를 펴보려 엄지로 몇 번 문질렀다. 그러나 한 번 구겨진 종이에는 자국이 남았다.

“옥희 할머니를 컬쳐씨앤씨에 소개한 사람, 저예요.”

“계장님이요?”

장례식 이후 채미는 자기 업무가 아니라는 말로 민원인을 돌려보내는 대신 담당자를 찾아 전화기를 넘겨주었고, 서류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성할 칸을 하나씩 짚어주었다. 공공 일자리 공고가 뜨면 옥희처럼 소식을 놓칠 만한 사람들에게 먼저 전화를 돌렸다. 채미의 업무수첩에는 최옥희를 시작으로 이연서, 서정희 같은 이름과 전화번호가 하나둘 늘어갔다. 신청 날짜를 알려주고 필요한 서류를 챙겨주기 위해 적어둔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법과 제도 안에서 도울 방법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는 기준보다 두 살이 많았고, 누군가는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까먹기도 했다. 사정은 제각각이었지만 서류 위에서는 모두 같은 세 글자로 정리됐다. 부적격.

“그때 박선자씨가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걸 봤어요. 원예를 전공한 것도, 관련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컬쳐씨앤씨가 필요 인력이라고 올리면 그만이더라고요. 업체가 직접 고용하는 인력은 공공 일자리 기준을 따르지 않으니까.”

“그래서 신 대표에게 부탁하신 거군요?”

“그래요.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름만 올린 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모두 실제로 일했다. 옥희는 행사 시작 전부터 나와 테이블과 의자를 닦았고, 연서는 검은 봉투를 들고 행사장을 돌며 쓰레기를 주웠다. 정희는 입구에서 프로그램표를 나눠주고, 길을 묻는 관광객들을 부스까지 데려다주었다. 문제는 사람의 몸이 서류처럼 오래 같은 자리에 머물지 못한다는 데 있었다. 어느 날 옥희는 무릎이 퉁퉁 부어 세 시간만 일하고 돌아갔지만, 근무 확인서에는 여전히 여덟 시간이 적혀 있었다. 채미는 붉은 펜으로 시간을 고치려다가 멈췄다. 한참 뒤, 고쳐 쓰는 대신 펜의 뚜껑을 닫았다.

“잘못인 줄 알면서요?”

“누가 몰라요? 세상에 누가 부정직한 인간으로 남고 싶겠어요?”

채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상자가 우그러졌다.

“그래서 매번 이번 한 번만이라고 생각했어요. 이번 행사만, 이번 달만. 그런데 사람 사정에는 마지막이 없더라고요. 옥희 할머니뿐인 줄 알아요? 여기에는 그런 사람이 넘쳐요. 이른 나이에 손주를 떠맡아 키우게 된 정희 아주머니는 손주 과자값이라도 벌고 싶어 해요. 당장 내야 할 약값조차 없는 연서 씨는 아픈 몸을 끌고 천막을 쳐요. 그 사람들한테 축제는 놀러 가는 날이 아니에요. 몇 달을 버티게 해줄 벌이를 하는 날이라고요.”

강은은 채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나는요. 규정과 사람 중에서 사람을 택한 거예요.”

채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강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게 사람을 택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계장님은 무수히 많은 사람 가운데 고작 몇 명을 택한 거예요.”

채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계장님 말씀처럼 옥희 할머니만 있겠어요? 똑같이 어렵고, 일하고 싶은데 써주는 데는 없고, 돈 벌고 싶은데 몸이 안 좋은 사람들이 한둘이겠냐고요. 그런데 계장님을 모르는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신 대표 같은 인맥이 없는 사람은요?”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일일이 찾아서 떠먹여 줘요?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부터 도우면 되잖아요!”

“그럼 평생 누구의 눈에도 띄지 못하는 사람은요? 그들을 찾아서,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두고, 겨우 그 문 앞까지 찾아온 사람이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밀려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 공무원 아닌가요. 누구에게 부탁해야 하는지 몰라도, 누구와 친하지 않아도,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게 공무원이잖아요.”

채미가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채도운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안녕!

3,336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4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54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3화[2화] 채미의 손에 들린 크래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