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고 꽤 많은 물건을 버렸다.
안 입는 옷을 정리하고, 안 쓰는 주방용품을 내보내고,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것들도 하나씩 줄였다. 집에 빈 공간이 생기니 확실히 편했다. 청소할 것도 줄고, 물건 찾는 일도 줄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집은 훨씬 심플해졌는데, 나는 별로 한가해지지 않았다.
퇴근하면 저녁 차리고, 설거지하고, 아이들 챙기고. 휴대폰엔 답해야 할 메시지가 쌓여 있고, 주말엔 또 할 일이 있었다. 살림살이는 꽤 줄였는데 내 하루는 그대로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물건만 줄였다. '해야 한다'라고 믿는 일은 하나도 안 줄였다.
예전엔 저녁을 차리면 국에 반찬 네 가지는 있어야 밥상 같았다. 퇴근하고 녹초가 돼도 국을 끓이고 반찬을 꺼냈고, 뭐가 부족하면 계란이라도 하나 부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하는 '제대로 된 저녁'이 그랬다.
요즘은 반찬 두 가지에 김만 올리는 날도 있다. 국 없는 날은 더 많다. 처음엔 좀 성의 없어 보이나 싶었는데, 이상하게 아이들은 별 신경을 안 썼다.
오히려 설거지가 빨리 끝났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시간이 줄어드니 아이들이 밥 먹다 꺼내는 학교 얘기를 조금 더 오래 들을 수 있었다.
그때 든 생각. 나는 그동안 누구 보라고 반찬을 네 가지씩 만들었을까.
휴대폰도 비슷했다.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오면 확인하고, 사진이 올라오면 반응하고, 대화가 이어지면 또 읽었다. 안 읽은 숫자가 쌓여 있으면 이상하게 밀린 숙제 같았다.
요즘은 알림을 끄고 나중에 몰아서 본다. 내가 바로 답을 안 해도 세상은 멀쩡히 돌아갔다. 저녁에 휴대폰 붙잡고 있는 시간도 슬쩍 줄었다.
선물 받는 일도 그랬다. 뭘 받으면 고마우면서 동시에 생각했다. '나도 뭘 줘야 하는데.' 받은 만큼 가격을 맞추려고 마트에서 한참 고민하기도 했다. 고마움이 어느새 숙제가 되어 있었다.
요즘은 그냥 받는다.
"잘 먹을게. 고마워."
거기서 끝내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주고 싶은 날엔 주지만,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는 계산은 안 하려고 한다. 그랬더니 오히려 고마움이 더 오래 남았다.
손님 오는 날도 달라졌다. 예전엔 누가 온다 하면 우리 집이 모델하우스라도 돼야 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평소엔 보이지도 않던 먼지가 하필 그날 눈에 들어왔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음식 하다 보면, 손님이 도착할 즈음엔 이미 내가 지쳐 있었다.
요즘은 눈에 보이는 곳만 대충 치우고, 음식은 필요하면 시켜 먹는다. 처음엔 미안했는데, 손님들은 우리 집 바닥상태엔 생각보다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주방을 왔다 갔다 하지 않으니 같이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주말도 그랬다. 아이들이 어릴 땐 주말마다 어디든 가야 할 것 같았다. 체험하고, 구경하고, 뭔가 특별한 걸 해야 좋은 엄마가 된 기분이었다.
요즘은 하루쯤 일부러 아무 일정도 안 잡는다. 아이들은 처음엔 심심하다고 한다.
"엄마, 오늘 뭐 해?"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러면 몇 번 서성이다가 자기들끼리 뭘 만들어서 논다. 나는 그동안 소파에 누워 있고.
이것도 미니멀라이프의 성과라면 성과다. 물건을 비웠더니 소파에 누울 자리만 생긴 게 아니라, 누워 있어도 된다는 마음까지 조금 생겼다.
내가 제일 마지막까지 줄이지 못한 건 물건이 아니었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잘 차려 먹어야 하고, 바로 답해야 하고, 받았으면 돌려줘야 하고, 손님 오면 깨끗해야 하고, 주말엔 아이들한테 뭔가 해줘야 하고.
하나하나 보면 다 좋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걸 전부 지키려 들면 하루가 꽉 차버린다.
물건이 적으면 삶도 저절로 단순해질 줄 알았다. 그런데 하루에 여백을 만들려면 다른 것도 비워야 했다. 꼭 안 해도 되는 일, 남들 하니까 나도 해야 할 것 같은 일, 안 해도 되는데 잘하려고 애쓰던 일.
요즘은 그런 걸 하나씩 줄이는 중이다.
그렇게 생긴 시간에 대단한 걸 하는 것도 아니다. 커피 한 잔 마시고, 아이들 얘기 듣고, 바카라을 좀 읽는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엔 그냥 눕는다. 예전 같으면 그 시간에 반찬 하나라도 더 만들었을 텐데, 지금은 안 만든다.
김과 계란이 있으니까.
물건은 금방 줄였는데, '잘해야 한다'는 마음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집은 꽤 비웠고, 이제 내 하루에도 빈자리를 조금 만들어보려 한다. 이번엔 그 자리를 굳이 다시 채우지 않을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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