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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비효율적인 온기

by린나이

선인장의 가시가 누그러졌다고 해서 고통이 소멸한 것은 아니었다.

최지안의 거친 숨소리는 여전히 젖은 모래처럼 바스락거렸고, 목덜미의 찢어진 피부 틈새로는 끈적하고 검푸른 수액이 쉼 없이 배어 나왔다.

"비켜라."



이수가 손에 쥔 전정가위를 가볍게 털어내며 차갑게 내뱉었다. 가윗날에 묻어 있던 검은 점액질이 온실 바닥의 이끼 위로 툭 털어져 내렸다.

"싫어요. 당신한테 이 사람 손대게 둘 순 없어요."

여름은 지안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지안의 체온은 사막의 한밤중처럼 서늘했지만, 여름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고동만큼은 분명 살아있는 인간의 것이었다. 여름의 단호한 시선이 이수의 서늘한 눈동자와 허공에서 팽팽하게 맞부딪쳤다.



이수의 얇은 입술 끝이 비틀렸다. 비웃음조차 묻어나지 않는, 철저히 무기물적인 냉소였다.

"감상에 젖어 얼토당토않은 영웅놀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저건 동정 따위로 사라질 잡초가 아니다. 뿌리가 성대와 식도, 경동맥의 혈관까지 파고들었어. 지금 억지로 도려내지 못하면 저 여자의 살점과 뼈를 흙 삼아 전신을 뚫고 터져 나올 거다."



"그렇다고 살점째 생으로 뜯어내겠다고요? 사람이 죽는다고요!"

"죽으면 죽는 거지."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대답이었다. 이수는 아무렇지 않게 앞치마 주머니에서 검은 리넨 천을 꺼내 가윗날을 닦아냈다.



"고통을 삼키지 못하고 안에서 썩혀 괴물을 잉태한 건 저년 자신이다. 감당 못 할 상처를 끌어안고 자폭하려는 생명체까지 내가 일일이 애도해 줘야 하나? 나는 내 몫의 비료만 거두면 그만이야."

"비료……? 사람 목숨이 당신한테는 고작 화초 거름이에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이수가 낡은 나무 탁자로 걸어가 찻잔을 들었다. 말린 달맞이꽃 잎이 우러난 창백한 찻물이 찻잔 안에서 미세하게 파문을 그렸다.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이수가 여름을 흘겨보았다.

"하지만 네 그 쓸데없는 오지랖 덕분에 전정의 최적기를 놓쳤다. 억지로 밀어붙였다간 저년의 목이 터져 내가 거둘 악몽의 진액마저 오염되겠지."



이수가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탁.

작은 마찰음이 온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내 정원의 질서를 어지럽힌 대가는 치러야겠지. 나갈 생각 마라."



"뭐라고요?"

"나갈 문은 잠겼다. 네가 저 미련한 사막을 끌어안고 날뛰는 바람에 내 귀중한 작업 시간이 꼬였으니, 저 식물이 완전히 안정을 찾고 내가 제대로 잘라낼 수 있을 때까지 넌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가."

이수는 손가락을 튕겼다. 온실 중앙의 문틀을 타고 검은 덩굴들이 기괴한 속도로 자라나 빗장을 지르듯 문을 얽어맸다. 여름이 기가 차서 입을 벌렸지만, 이수는 이미 그녀를 시야에서 지워버린 듯 등을 돌렸다.



"할 일이 없으면 온실 바닥이나 쓸어라. 흙투성이 발로 기어들어 온 네 꼴을 보니 빗자루질이라도 시켜야 분이 풀릴 것 같으니까."

오만하고 재수 없는 태도였다. 여름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저 남자의 멱살을 잡고 문을 열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품에 안긴 지안이 다시 가늘게 경련을 일으켰다. 지금 여름에게 중요한 것은 이수와의 자존심 싸움이 아니었다.



"……물, 물이라도 줘요. 이 사람 목이 다 탔다고요."

이수는 대꾸도 없이 찻주전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여름은 이를 악물었다. 온실 구석의 수도가로 가 낡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왔다. 차가운 지하수를 손수건에 적셔 지안의 타들어 가는 입술을 닦아주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젖은 마포를 주워 지안이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이수는 온실 가장 높은 곳에 놓인 철제 의자에 기대앉아 바카라을 펼치고 있었다. 시선은 활자에 닿아 있었지만, 그의 날카로운 감각은 온실 바닥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여름의 모든 동선을 포착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이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상처를 입은 인간에게 물을 주고 온기를 나누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다. 고통은 철저히 메말려 태워버리거나 날카롭게 잘라내야만 정화되는 법이다. 어쭙잖은 위로와 공감은 괴물의 번식력을 키울 뿐이었다. 이수는 여름이 고작 몇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피와 흙에 질려 문을 열어달라 울부짖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여름은 울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았다.



여름은 밤새 지안의 곁을 지켰다. 찢어진 목덜미에서 흘러나오는 피고름을 닦아내고, 식은땀을 흘리며 헛소리를 내뱉는 지안의 차가운 손을 맞잡아주었다.

"괜찮아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숨 크게 쉬어요. 천천히……."

여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기묘할 정도로 단단했다. 건축가로서 수많은 도면을 검토하고, 무너질 것 같은 지반을 단단히 보강하던 그 침착함이 지안의 붕괴된 내면을 지탱하고 있었다.



지안이 꺽꺽거리는 숨 사이로 더듬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 내가, 다 망쳤어요…… 팀장님이…… 내가 무능하다고…… 아무 말도 못 했어요. 바보같이 웃기만 하고…… 목구멍에 돌이 박힌 것 같았는데……."

"알아요. 말 못 할 때 얼마나 숨 막히는지, 내가 알아요. 그건 당신 탓이 아니에요."



여름의 손이 지안의 떨리는 등을 토닥였다.

그것은 이수가 천 년 동안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가장 비효율적이고 비과학적인 ‘위로’였다.

그 순간, 온실 구석의 커다란 몬스테라 잎 뒤에서 조그마한 녹색 실루엣이 스르륵 나타났다. 온실의 식물 정령, 모모였다. 새싹 같은 귀를 쫑긋거린 모모가 이수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모모…… 뀨?"

모모가 작은 잎사귀 손으로 지안과 여름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수가 바카라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나직하게 물었다.

"왜 그러나."



모모가 이수의 귓가에 조심스레 숨을 불어넣듯 기운을 전했다. 식물의 오라를 읽어내는 정령의 감각이었다.

이수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 했다.

모모가 전해온 감각은 기이했다. 보통 극심한 트라우마에 찌든 인간의 악몽은 시커멓고 탁한 썩은 물의 농도를 띤다. 악취가 진동하고, 오직 증오와 자바카라만이 뒤엉킨 끈적한 독기. 이수는 늘 그 독기만을 섭취해 정화의 비료로 삼아왔다.



그런데 지금, 지안의 목에서 피어오르는 악몽의 농도가 변하고 있었다.

탁하던 검은 안개 사이로 은은한 달빛 같은 푸른빛이 감돌았다. 슬픔의 깊이는 더 깊어졌지만, 독기는 기적처럼 옅어지고 있었다. 상처가 곪아 터지는 것이 아니라, 억눌렸던 눈물이 흐르며 굳어있던 응어리가 서서히 풀려나가는 냄새였다.



'악몽의 농도가…… 맑아졌다고?'

이수가 천천히 바카라을 덮었다.

그의 칠흑 같은 시선이 철제 난간을 넘어 바닥으로 향했다.

새벽빛이 유리 천장을 뚫고 비스듬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푸르스름한 박명 속에서, 여름은 흙투성이가 된 무릎을 꿇은 채 지안의 머리를 무릎에 뉘이고 있었다. 온실 바닥을 치우느라 손톱 밑에는 새까만 흙이 끼어 있었고,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에 달라붙어 엉망진창인 몰골이었다.

그러나 지안의 목구멍을 찢고 솟아올랐던 선인장은, 밤사이 더 이상 자라나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롭게 뻗쳐 있던 굵은 가시들이 물기를 머금은 듯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스륵.

이수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인기척을 느낀 여름이 고개를 들었다. 밤을 꼬박 새워 충혈된 눈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새벽의 서리처럼 맑고 또렷했다.



이수는 묵묵히 다가와 지안의 목덜미를 내려다보았다.

여름이 반사적으로 몸을 굳히며 지안을 감싸 안으려 하자, 이수가 낮게 읊조렸다.

"가만히 있어."

이수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의 창백하고 차가운 손끝이 선인장의 본체가 아닌, 지안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여름의 손등을 스쳐 지나갔다.



여름의 손등에는 흙과 땀, 그리고 미지근한 온기가 묻어 있었다.

천 년 동안 오직 얼어붙은 이성과 가위질만을 믿어왔던 이수의 손끝에, 난생처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낯선 맥박이 전해져 왔다.

이수의 시선이 여름의 거칠고 흙 묻은 손끝에 깊게 박혔다.



"……멍청하도록 미련한 짓을 하는군."

입으로는 여전히 가시 돋친 독설을 뱉었지만, 이수의 서늘한 눈동자 속에는 수천 년간 한 번도 일렁인 적 없던 기묘한 파문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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