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풍경이 되어 : 반석천의 물줄기 속에서

현재라는 점 위에서 목격한 과거와 미래의 움직임

by옫아

익숙한 물소리가 들리는 반석천 옆 식당, 오랜만에 모인 고등학교 동창들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반석고 교정을 거닐던 때로부터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은 시간. 우리들의 대화는 지나온 날들의 농담과 살아내야 할 날들의 고단함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때, 식당 창문 너머로 낯익은 풍경 하나가 흘러갔다.


첫 번째 풍경은 동창의 얼굴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이름과 얼굴 정도만 희미하게 기억나던 한 아이가 반석천 산바카라로를 걷고 있었다. 첫째 아이를 트라이크에 태운 채, 친정부모님의 호위를 받으며 걷는 동창의 배는 이미 만삭이었다. 곧 세상에 나올 둘째를 품은 그 무거운 걸음걸이. 눈이 마주쳤지만 서로 얼굴만 아는 사이였기에 그저 가만히 시선만 스쳐 보냈다. 그 아이는 지금 자신의 생에서 가장 뜨거운 ‘미래’를 몸속에 품은 채, 부모라는 자신의 ‘과거’와 함께 걷고 있었다.


두 번째 풍경은 조금 더 아련한 잔상을 남겼다. 고등학교 시절, 내게 글짓기에 대해 아낌없는 조언을 건네며 문학의 눈을 뜨게 해 주셨던 문학 선생님이었다. 그 시절에도 정년퇴직을 앞두고 계셨던 분. 10년이 지난 지금 눈앞에 보인 선생님은 몰라보게 노쇠해져 계셨다. 허리는 굽었고 걸음은 둔탁해졌지만, 푹푹 찌는 한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여전히 반려견을 산바카라시키며 묵묵히 걸어가고 계셨다. 그 굽은 등 위로 오랜 세월 축적된 ‘과거’의 무게가 얹혀 있는 듯했다.


참 묘한 기분이었다.

붙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반석천의 물줄기처럼,

우리가 과거에 알던 사람들이 각자의 생을 품고 눈앞을 강물처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이.


우리는 '현재'라는 찰나의 점 위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고정된 점 위에서 유리창 너머를 바라보는 동안, 그들의 끊임없는 움직임은 그대로 거대한 시간의 흐름이 되어 우리 눈앞을 관통했다.


움직이는 그 궤적을 가만히 좇는 순간, 기묘하게도 과거와 현재, 미래가 단 하나의 시점에 한꺼번에 공존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 글짓기를 도와주시던 시절의 '과거'를 고스란히 품은 채 늙어가시는 선생님의 걸음과, 우리가 치열하게 딛고 서 있는 이 '현재', 그리고 머지않아 다가올 또 다른 생의 '미래'를 만삭의 몸으로 대변하는 동창의 걸음까지. 선형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 줄 알았던 시간의 축이, 우리가 서 있는 '현재'라는 점을 중심으로 반석천 위에서 일시에 압축되어 흐르는 듯한 경이로운 감각이었다.


어쩌면 그들의 눈에도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점이자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의 시선에는 여전히 철부지 아이 같을 우리가, 만삭의 동창 시선에는 잠시 육아의 짐을 내려놓고 자유로워 보이는 우리가 잔상처럼 남았을 지도~?



우리는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지는 않았지만,

각자의 속도로 흐르는 강물 위에서 서로의 존재를 목격했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 미래는 아득히 먼 세대의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반석천의 물줄기처럼, 우리는 서로를 스치며 나란히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저마다 붙잡고 있는 삶의 자리에서 조용히 점을 찍고,

저마다의 움직임을 이어가며.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강물이 되어가면서.



P.S.

그날 창문 너머로 마주한 세상은 내게 기묘하고도 아득한 이중의 감각으로 일렁였다.

눈에 담기는 저마다의 삶이라는 서글프고도 아름다운 풍경(風景).

그리고 그 눈부신 이미지 위로, 보이지 않는 세월의 흐름이 반석천의 바람을 타고 날아와 내 귓가에 맑게 매달리던 풍경(風磬)의 소리.


어쩌면 시간은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도 듣는 것일지 모른다.


눈앞을 스쳐 가던 그들의 묵묵한 걸음걸이는 내게 한 편의 움직이는 풍경화였고,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그 걸음들이 반석천의 물소리와 겹쳐지며 쨍그랑, 하고 맑은 청동 종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이 바람을 밀어낼 때마다 내 삶의 처마 밑에서도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보는 풍경이면서 동시에 들리는 풍경.


그 두 가지 풍경이 겹쳐지던 찰나의 순간, 나는 깨달았다.

세월은 그저 멀리서 흘러가 버리는 강물이 아니라,

지금도 내 귓가를 파고들며 끊임없이 존재를 흔들어 깨우는 투명한 소리라는 것을.

그 공감각의 여운 속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서 있는 현재라는 자리를 조금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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