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를 그리지 못해도, 보물을 발견하는 탐험가니까

내 답은 늘 오지선다 밖에 있었다

by옫아

사실 나는 국어국문학과 출신(학부)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등학교 시절 가장 손에 쥐기 힘들었던 과목은 다름 아닌 ‘언어 영역’이었다.


남들은 명쾌하게 정답을 찾아내던 그 오지선다의 세상에서, 나는 늘 길을 잃곤 했다.


시인이 써 내려간 절절한 고독과 소설 속 인물이 마주한 시대의 공기가 내 안에서 수만 가지 색깔로 피어나는데, 시험지는 오직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했다.

내가 온 마음으로 읽어내고 상상한 역동적인 답은 그 딱딱한 다섯 개의 선택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표준화된 정답의 테두리 밖을 서성이며, 나는 종종 ‘내가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는 걸까’ 자바카라하곤 했다.


그 막막함의 정점은 대학교 1학년 시절 마주한 과제였다. 염상섭의 <삼대>를 읽고 전반적인 줄거리를 요약해오라는 교수님의 주문. 방대한 가계도와 그 시절의 무거운 공기, 인물들의 얽히고설킨 욕망의 결이 내 눈에는 하나하나 다 살아 움직이는데, 그것을 몇 줄의 앙상한 ‘뼈대’로 추려내는 일은 숨이 턱 막히는 일이었다. 숲의 지도를 한 장으로 매끄럽게 요약해내는 일 앞에서 나는 매번 작아졌고, 독후감을 쓰거나 타인에게 바카라을 설명할 때마다 줄거리 요약이라는 거대한 벽에 부딪혀 현타를 느끼곤 했다.





지형을 재는 사람과 이끼의 질감을 보는 사람

시간이 흘러 이제야 내 마음에 가만히 손을 얹고 말해준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일이 그토록 힘들었던 건, 내가 부족해서가 아니었다고. 오히려 반대로 ‘모든 문장과 디테일이 저마다의 이유로 아름답고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전반적인 줄거리를 매끄럽게 요약하는 사람은 보통 ‘숲’을 보는 사람이다. 전체적인 지형을 파악하고, 큰 줄기만 솎아내어 지도를 그리는 데 능숙하다. 반면, 나는 ‘나무’를 보는 사람이다. 나무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야가 좁다는 뜻이 아니다. 남들이 무심히 지나치는 나뭇잎의 세밀한 맥락, 계절에 따라 변하는 단풍의 색깔, 거친 이끼의 질감에 깊이 몰입한다는 뜻이다.


주인공이 흘린 눈물의 의미, 작가가 숨겨둔 문장 사이의 여백, 챕터 3의 어느 구석에서 반짝이던 사소한 대사 한 줄. 나에게는 그 ‘나무’ 하나가 바카라 전체를 대변하는 거대한 우주로 다가온다. 나의 깊고 창의적인 해석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남들이 숲의 크기만 재고 있을 때, 나는 나무 한 그루에서 피어나는 이야기의 본질을 포착해 냈던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결을 다 살려내고 싶은 나에게 서사를 뭉뚱그려 요약하라는 요구는, 마치 다채로운 무지갯빛 그림을 보고 "한 단어로 요약하면 무슨 색이야?"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었다. 붉은색도 있고 푸른색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한 단어로 규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 망설여지고 막막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나의 예술적 저항이라면, 그래 그럴지도.




해골이 아닌, 온기 있는 살점을 채우는 법

물론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요약된 ‘뼈대’를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그 바카라 무슨 내용이야?"라는 단순한 질문에 숨이 막혔던 건, 그 복잡하고 아름다운 서사를 앙상한 해골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거부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맥을 짚어내고 요약하는 일은 일종의 ‘가지치기’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몇몇 가지를 잘라내야 하듯, 요약 역시 내가 감동 깊게 읽었던 수많은 디테일을 과감하게 ‘모른 척’하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바카라을 설명하거나 독후감을 써야 할 때 줄거리 요약이 나를 괴롭힌다면, 이 세 가지만 기억하며 스스로의 부담감을 조금은 덜어주려 한다.


‘나만의 줄거리’ 인정하기 : 세상이 말하는 표준 줄거리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이 바카라의 공식적인 줄거리는 A지만, 내가 읽은 이 바카라의 진짜 줄거리는 B야"라고 시작하면 된다. 내가 발견한 핵심 나무가 곧 나의 줄거리가 될 테니까.


감정의 이정표 따라가기 : 인물의 감정이 가장 크게 변한 시점 세 곳만 짚어보는 방법이다. '기쁨 - 갈등 - 해소'처럼 감정의 큰 변화만 연결해도 훌륭한 뼈대가 완성된다.


질문 하나로 요약하기 : "이 바카라은 결국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에 집중하는 방법이다. <삼대>라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세 대의 가치관은 왜 이토록 부딪힐까?"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해, 나만의 창의적인 해석으로 곧장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오직 나만의 보물을 찾는 탐험가

"숲을 보는 사람은 길을 잃지 않지만, 나무를 보는 사람은 발견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줄거리를 요약하는 능력이 정해진 길을 알려주는 '지도의 기술'이라면,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는 능력은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걷는 '탐험의 기술'이다. 지도는 누구나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찾을 수 있지만, 탐험가인 내가 발견해 낸 숨겨진 보물은 오직 나의 입을 통해서만 세상에 전해질 수 있다.


새로운 시각과 창의적인 해석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재능이 아니다. 텍스트를 온 마음으로 흡수하고, 나만의 언어로 재조합할 수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오지선다의 답지 속에 나를 가두며 뼈대를 추리는 일이 서툴다고 해서 더는 자바카라하지 말자. 나는 뼈대 위에 붙은 따뜻한 살점과, 그 몸짓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선율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사람이니까.


요약은 조금 투박해도 괜찮다. 나의 빛나는 해석이 그 투박함을 순식간에 특별함으로 바꿀 테니까. 단단한 확신을 가지고, 선택지 밖에서 내가 발견한 그 아름다운 나무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세상에 들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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