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고성 여행기(2)
우리나라에서 '고성'하면 두 군데가 떠오른다. 강원도와 경남에 있는 '고성'이 각각 그곳이다. 휴양지로는 강원도 고성이 더 유명하지만 집에서 가까운 여행지를 찾다 보니 의외로 볼거리가 많은 경남 고성이 최종 물망에 올랐다.
경남에선 '고성'하면 자연스럽게 공룡을 떠올린다. 화석이나 발자국등 공룡의 흔적들이 많이 발견된 데다 이를 기반으로 한 공룡 박물관과 해마다 열리는 공룡축제는 어느덧 고성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고, 어린 자녀들을 두었다면 한 번쯤은 방문해야 할 경남의 필수코스로 자리매김한 지도 오래다.
나 또한 아이들이 어릴 때, 특히 공룡을 좋아했던 두 아들을 둔 죄(?)로 반 의무적으로 다녀온 기억이 있다.
이번엔 아이들이 아닌 나의 구미가 당기는 코스로 돌아보기로 했다. 일단 복잡한 건 차치하고, 첫 번째 목적지만 정했다. 여행에선 식도락이 늘 우선순위이므로 아침 겸 점심을 먹을 식당을 먼저 검색했다.
아침도 거르고 기대와 셀렘으로 찾아온 식당은 고성시장 근처에 있었다. 노부부 두 분이 운영하는 곳으로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식당이었다. 많은 가짓수의 반찬에 탄성이 절로 나오고 집밥 같은 슴슴한 맛에 젓가락질이 분주했던 나와 달리, 메인인 전복해물탕이 좀 비릿했는지 남편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칭찬일색인 블로그만 믿고 왔지만 처음 방문의 호불호를 감당해야 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증 하나인 것을...
식당과 5~6분 거리에 송학동 고분군이 있어서 식사 후 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시내에 아니, 읍내 한가운데 이렇게 웅장한 고분이 여럿,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삼국시대 가야의 일부인 소가야 왕실의 무덤이 즐비한 이곳은 마치 경주의 오릉 앞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송학동 고분군은 가야시대(42~562)에 조성된 7개 고분(김해, 함안, 합천, 고성, 창령, 고령, 남원)중 하나로 5세기부터 유력한 해상세력으로 부상한 소가야의 왕과
지배층의 무덤이다.
축조방식이나 발굴된 부장품을 통해 당시 기술 수준과 백제, 신라, 왜(일본)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역사 자료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도 등재되었다고 한다.
몇 천 년 전 천지를 호령하던 조상들의 무덤을 둘러보면서, 그 거대한 규모에 놀라고, 당시 첨단 기술 없이 가혹한 노동에 동원되었을 평민들의 고달픈 삶이 상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먼 훗날에 이르러 자신들의 찬란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온몸으로 증명한 훌륭한 결과물로 남았으니, 그들의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다음 목적지는 여러 후보군들 중에서 송학동 고분군에서 차로 3~40분 거리에 있는 상족암 군립공원으로 정했다.
구불구불한 커브길을 한참 달려 푸른 바다가 펼쳐진 해안가에 이르렀다. 공원을 중심에 두고 양쪽으로 해안 테크길이 이어져있었다. 우린 요즘 SNS에서 인생샷 찍기 명소로 알려진 상족암 해식동굴 쪽으로 난 산바카라길을 택했다.
해안가를 차지하고 있는 너럭바위에는 공룡의 발자국으로 추정되는 움푹 파인 흔적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고성에선 아무리 피해 다녀도, 공룡에서 영 자유로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테크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로 옆에서 곁을 호위하는 주상절리들을 마주하게 된다. 절벽의 단면들은 수 만년의 세월을 견디며 층층이 쌓인 천연의 예술 작품들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산바카라 길의 중간 지점에 이르자 해식동굴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파도의 침식작용이 만들어낸 천연 동굴로 사진 찍기 명소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낙석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군데군데 출입을 통제하는 곳도 있었지만 다행히 사진 몇 장은 남길 수 있었다.
동굴 입구가 바다에 바로 맞닿아있어 멋진 작품을 남기려면 들이치는 파도와 작은 실랑이를 벌여야 했는데 잠시나마 자연과의 술래잡기로 동심의 세계를 맛볼 수 있었다.
출발지로 되돌아오면서 저 멀리 맞은편에 펼쳐진 병풍바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마을을 보호하는 수호신처럼 바다 한가운데 펼쳐진 병풍 모양의 절벽은 주상절리의 결정판이었다. 거기까지 걸어갈까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번엔 여기까지... 다음번엔 병풍바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유람선 코스가 있는지 알아보자며 아쉬운 마음을 애틋한 여운으로 달랬다.
근처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물고 다음 여정을 논의했다. 여러 곳을 둘러봤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은 겨우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대로 여행을 마무리하기는 왠지 아쉬워서 한 군데를 더 가보기로 했다.
여러 후보지들 가운데서 7월 초까지 수국축제가 열린다는 그레이스 공원으로 낙점했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그래이스 공원은 시유지로 입장료가 있었다. 성인 한 명당 1만 원의 비용인데도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많은 차와 사람들로 주차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규모가 외도 보타니아에 미치진 못했지만 나름 곳곳에 테마를 정해 아기자기하게 정원을 가꾼 정성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우리도 입구에서 받은 지도를 길라잡이 삼아 이곳저곳을 탐험하듯 누비며 사람들 속에 섞여 사진을 찍고,
산바카라도 하며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지쳐갈 때 즈음, 정원 중간에 위치한 야외 카페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습한 공기를 무기 삼은 더위와 반 이상 저버린 수국에 아쉬워하며 자연스럽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전에는 참 잠도 많았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침에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하물며 주말은 더 심했다. 오전 한나절을 반납한 후에야 겨우 눈곱을 떼며 점심을 늦은 아침 삼아 때우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니 주말은 남들의 반만 산 셈이다. 더욱이 평일에도 오후가 되어서야 일을 시작하는 우리에게 그 습관은 고착화되었고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다. (남편은 아직도 신념화된 그 습관을 고수하려 한다ㅠ)
나이가 드니 아침잠이 줄어들면서 자연히 시간이 많아졌다.
그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다는 그 귀한 시간을 거저 얻은 것 같은 짜릿함을 느낄 때도 종종 있다.
특히 이번처럼 낯선 곳을 실컷 돌아다녔는 데도 집에선 겨우 몸을 추스르며 늦은 아침을 막 끝낸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시간의 상대성이란 게 참 아이러니하면서도 신기하기만 하다.
비약일지 모르지만 왠지 숨겨졌던 하루의 위대함을 발견한 느낌이라고 할까? 돈을 절약할 줄만 알았지 개념 없이 시간을 낭비했던 나에겐 특히 그랬다.
하지만 좋은 시간도 결국은 지나가버린다는 사실은 늘 아쉬움을 남기는 부분이다.
이제 '고성'은 나에게 공룡에만 한정된 곳이 아니다. 그 멋진 바다를 품고, 한 때 가야 시대를 이끌었던 해상 세력의 이미지가 하나 더 추가된 셈이다. 고성을 지날 때면 '소가야 가는 길'이라는 이름의 휴게소가 남긴 의문을 이제야 조금 이해한 듯도 하다.
아직도 볼 곳이 많은 이곳을 다시 방문하자는 약속을 남기며 집으로 향했다. 점심이 못내 아쉬웠던 남편을 위해 맛집으로 검색된 중국집을 둘러 짬뽕과 탕수육을 먹고 왔다.
음식은 역시 중식이지. 고성 여행이 즐겁게 추억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확실히 한 셈이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