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잘되려고 줄였는데, 내가 먼저 닳고 있었다

운영비 ver. 2.0

by윤슬살롱

퇴근하다가 운동화를 봤다.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잠깐 서 있다가 그냥 방향을 틀었다. 한 시간쯤 몸을 움직였다. 땀을 흘리고, 샤워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별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다시 좀 할 만해졌다. 며칠 뒤에는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밥은 먹을 수 있지?” “그 정도는 아직.” 피식. 일은 남아 있었지만 나갔다. 맛있는 걸 먹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한참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카라 한 권을 샀고, 먹고 싶던 빵도 하나 샀다. 마음에 든 작은 물건 하나에도 돈을 썼다. 통장 잔액은 아주 조금 줄었는데, 하루는 조금 더 내 것이 됐다. 한동안은 잘되려면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쓸데없는 지출을 줄이고, 약속을 줄이고, 쉬는 시간을 줄였다. 운동은 일이 끝나면 하고, 친구는 시간이 남으면 만나고, 좋아하는 것은 조금 더 자리 잡은 뒤에 누리기로 했다. 지금은 바쁘니까. 이번 것만 끝나면. 조금만 더 잘되면. 그렇게 미뤄둔 것들이 꽤 많아졌다. 음. 분명 아끼고 있는데 내가 점점 비싸게 고장 나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운동도, 사람도, 좋아하는 것도 모두 잘 해낸 뒤에 받는 보상 칸에 넣어두고 있었다. 하지만 꼭 그 순서일 필요는 없었다. 끝낸 뒤에 받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이었다. 잘 돌아가게 하려면 운영비가 든다. 나도 다르지 않았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은 남아 있다. 그래도 저녁 한 시간을 비워두었다. 다 끝낸 뒤 시간이 남으면 쓰려고 하지 않고,

이번에는 먼저 쓴다. 음. 운영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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