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엔 번개, 땅엔 객기.

산티아고 순례길 : 9일 차, 나헤라 -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

byDK

혼자 견뎌야 할 우주는 아직.


앞에서 매우 다정하게 걷는 커플을 보더니, 아내가 팔로 하트를 만들어 보인다. 혼자 걷는 사람도 꽤 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걷고 있었다. 연인, 부부, 부자, 모자, 가족, 3대 가족, 친구... 그리고 산티아고에 가까워지면 수학여행처럼 학교 단위로 걷는 스페인 학생들도 볼 수 있다.


혼자 걸어도 당연히 좋을 것이다. 스스로 서는 법을 배우고, 오래 침묵하거나 깊게 사유하고, 외진 길의 한가운데서 길게 슬퍼할 수도 있겠지. 기쁨이 차올랐는데 나눌 수는 없어 스스로의 안에 더 진하게 새길 수도 있을 것이다.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처럼, 혼자 내면의 소리를 듣고, 기도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이 길을 혼자서 걸어볼 수 있을까 싶다가도, 그럴 필요 있을까? 싶어진다. 2인3각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끈이 풀어지지 않는 한, 뭐든지 함께다. 인생이 결국 혼자라는 말도 아직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두 개의 세상이 있고, 나는 아직 아내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 견뎌야 할 우주는 없는 것으로 여긴다.


다정하게 걷던 커플 순례자
아내가 하트를 보낸다. 나에게겠지.


우비가 피어나는 길


갑자기 비가 시작되었다. 화려한 우비들이 길에 피어났다. 아래 사진의 왼쪽 사람처럼 별도의 우비 없이 배낭커버와 방수 재킷으로 비에 대처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는 배낭을 포함해서 온몸을 덮어쓰는 우비 형태로 준비한다. 그중 제일 좋아 보이는 건 오른쪽 빨간 우비를 입은 사람처럼 팔이 분리돼 있고, 배낭 모양이 별도의 주머니처럼 확실하게 잡힌 것들이었다. 우리 부부가 준비 한 건 전통적인 판초우의 스타일이었는데, 팔이 자유롭지 못했고 바람이 불면 펄럭거리는 단점이 있었다.


왼쪽은 우비 없이 배낭커버 따로, 방수재킷 따로. 오른쪽은 팔이 분이되고 배낭자리가 있는 우비.


캘리포니아 할배들


이 길에서 캘리포니아 할배들과 정식으로 인사했다. 어릴 적에 이민을 가신 분들이었고, 캘리포니아에 사신다고 했다. 은퇴 기념으로 산티아고를 걷기로 했다 하셨다. 두 분은 동기. 한 분은 후배. 셋이 의기투합해서 이 길까지 오셨다. 이 분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티아고에 하루 차이로 도착했다.


내가 언젠가, 가족 말고, 누군가와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된다면, 특히나 그들과 싸우거나 헤어지지 않고 산티아고에 닿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랑 이 길을 와 볼 수 있을까? 누구에게 '함께 가자'로 해볼까? 그런 친구가 나에게 몇이나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빗속을 걸었다. 없으면 또 어떤가... 탈출구도 생각하면서.


캘리포니아 할아버지들. 은퇴를 하고 평소 꿈꾸던 산티아고로 오셨다.


번개 아래를 걷는 미친 순례자들


비는 폭우로 변했고, 들판에는 번개가 쳤다. 어떤 번개도 한 번만 치고 마는 경우는 없다. 피뢰침을 단 건물이 주변에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들판을 걷는데, 번개는 계속 쾅쾅 소리를 내면서 들판 멀리에 꽂혔다. 이러다 번개에 맞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계속 걸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위험하다면 어떤 경고방송 같은 게 나오겠지. 사이렌이라도 울리겠지, 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고방송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괜찮은 사인으로 지레 판단했다.

또 하나는, 주변의 순례자들이 계속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 말고도 나 같이 하는 사람들 많네. 괜찮은가 보네, 하는 군중심리였던 것인데, 그들도 나와 같은 초보 순례자라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이 길의 안전을 아무도 바카라임져주지 않는 길. 상대의 무모함으로 내 무모함의 핑계로 삼은 길. 지나고 보면 아찔한 순간들이 있는데, 이때가 그랬고, 이날의 날씨와 위험은 이틀 후 산 후안 데 오르테가의 식탁에서 주된 화제로 올랐다.


지나치게 펄럭이던 우리들의 우비. 방수능력은 최고였는데...


대피소가 된 골프 클럽하우스


폭우의 끝물 무렵 시우에냐라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고, 순례자들이 비를 피해서 우르르 한 건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곳은 리오하 알타 골프 클럽의 클럽하우스였다. 한쪽에는 골프를 치다가 비 때문에 피신해 있는 클럽 내방객들, 한쪽에는 폭싹 젖어버린 신발과 양말을 정비하며 고린내를 풍기는 순례자 무리가 있었다.

순례길 가운데 있는 골프장이어서 그런지 클럽하우스의 직원들은 순례자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클럽이 자비로 준비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입구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새 우비를 나눠주기도 했다.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화살표가 그려진 것이었는데, 기념품으로 좋을 것 같아서 며칠을 배낭에 넣어 다니다가 결국은 무게를 줄이려고 버리게 되었다. 클럽하우스에서 퀄리티 좋은 샌드위치나 빵, 커피와 음료수를 팔고 있어서 '넘어진 김에' 간식 타임을 가졌다. 그새 마을 저쪽에서부터 하늘이 개어 가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앞쪽의 동네와 개어가는 하늘.


비가 물러가는 들판


저 멀리 산토 도밍고가 보이는 산등성이에 벤치가 있는 휴식 공간이 있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쯤 되는 어린 자녀 둘을 데리고 순례를 하는 부부가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좋은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 오지 못한 것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가족이 떠난 자리를 우리가 차지했다. 바나나를 먹고 물을 마셨다. 아내는 구름이 비를 뿌리는 모양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구름이 들판 저쪽에 비를 뿌리는 풍경을 신기하게 구경했다. 흠뻑 젖은 트레킹화를 벗고 맨발로 바람을 쐬었다.

이제 몇 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고, 길이 평탄해졌고, 찌걱거리면서 걷기가 싫어서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하지만 잔돌이 굴러다니는 길을 슬리퍼로 걷는 건 쉽지 않았다. 자꾸 슬리퍼 안으로 잔돌이 들어왔다.


멀리 비내리는 구름을 쳐다 보며.



해맑은 산토 도밍고


산토 도밍고에서는 맑은 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우비를 입든, 고어텍스건 아니건 결국은 젖게 되는 게 트레킹화. 모두들 신발 보관소 한켠에 잔뜩 쌓아 둔 신문을 가져다가 젖은 신발 속에 잔뜩 구겨 넣었다. 일부는(사실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었다) 재빠르게 움직여서, 양지바른 벽에 젖은 신발을 나란히 세워 두었다. 도시는 빠르고 고르게 말라가고 있었고, 석양은 눈부셨다.


산토 도밍고 데 라 칼사다의 성당 첨탑. 화려하다.
빨래터 옆 건물 벽. 햇볕은 죄가 없다. 바싹 말리기에 시간이 부족했을 뿐.



오늘 태양은 오전 반차. 오후만 일하고 퇴근하는 태양.

오늘의 태양이 할 일을 다 마치고 퇴근 중.





2025년 5월 2일
나헤라 - 산토도밍고 데 라 칼사다
Nájera - Santo Domingo de la Calzada
구간 거리 21.0km
생장에서의 누적거리 21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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