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메트, 나일강의 기억

이집트 - 프롤로그

by그루

케메트


2003년 1월의 어느 날, 나는 그날의 여정을 마치고 어디론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다. 굳이 기억을 더듬자면 룩소르 주변이었거나, 에드푸 근방에서 아스완을 향해 달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나일강을 따라 난 푸른 농경지가 왼쪽으로 펼쳐졌고, 오른쪽으로는 바로 사막이 이어졌다. 농경지와 사막이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색깔을 달리하는 풍경은 너무나 생경해서, 한 걸음만 내디디면 사막과 푸른 대지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시는 첫 이집트 여행이어서 이집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은 의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어스름하니 밤안개가 내려앉기 시작한 늦은 오후, 낮은 흙담으로 이어진 집들에서 하나둘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안개 때문이었을까? 집집마다 창문에서 새어 나온 등불은 영화에서 보았던 가스등을 연상시켰다. 버스 차창 밖으로, 키 큰 야자나무 틈에서 짙은 색 갈라베야(Galabeya)를 입은 농부가 꾸러미를 둘러매고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순간 농부의 발아래 펼쳐진, 검다 못해 까만 흙의 대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여행 오기 전에 읽었던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 2세》에서 숱하게 묘사된 검은흙이었기 때문이다. 금방 갈아엎은 검은흙의 대지는 도시로 들어올 때까지 이어졌다. 그 검은 빛깔은 내려앉는 어둠 때문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도 분명하게 검은, 진짜 검은 진흙이었다. 케메트였다.


나일이 상류에서 몰고 온 비옥한 토양 성분이 케메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주변의 비옥한 땅을 ‘검은 땅’, 케메트(Kemet)라고 불렀고, 강이 닿지 않는 사막은 ‘붉은 땅’, 데슈레트(Deshret)라고 불렀다. 버스 창밖에서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던 농경지와 사막이 바로 그 두 땅이었다. 삶이 가능한 땅과 그 바깥의 땅. 앞으로 이 글이 찾아갈 피라미드와 무덤들은 대부분 그 붉은 땅 위에 서 있다. 그리고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가리킬 때 붉은 땅이 아니라 검은 땅의 이름, 케메트를 썼다.


이를테면 중왕국 시대의 소설 《시누헤 이야기》는 주인공 시누헤가 레체누(Retjenu, 오늘날의 시리아·팔레스타인 일대를 가리키는 고대 이집트의 지명)에서 정치적 망명 생활을 하다가 말년에 왕의 허락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소설 속에서 그는 레체누에서의 성공적인 망명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자신의 조국 ‘케메트’를 늘 그리워했다.


그 그리움의 대상, 검은 땅을 만든 것은 나일강의 리듬이었다. 나일강의 범람과 농경의 주기는 이집트인들에게 세 계절을 가져다주었다. 고대 이집트의 계절은 아크헷(Akhet), 페르트(Peret), 셰무(Shemu)로 나뉘었다. 오늘날의 달력으로 정확하게 대응시키기는 어렵지만, 대략 한 계절이 네 달씩 이어졌다.


아크헷은 ‘범람의 계절’이다.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강 주변의 저지대 농경지가 물에 잠기고, 물이 빠진 뒤에는 비옥한 토양이 남았다. 페르트는 ‘출현의 계절’이다. 범람한 물이 빠져 땅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파종이 시작되고, 작물이 자라기 시작했다. 셰무는 ‘수확의 계절’로, 익은 곡식을 거두는 시기였다.


2003년 1월의 그 농부가 서 있던 땅도 아마 페르트의 땅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페르트라는 말을 알지 못했지만, 금방 갈아엎은 검은흙은 범람이 물러간 뒤 씨앗을 기다리는 땅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수천 년 동안 지켜온 계절의 한가운데를, 아무것도 모른 채 지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강을 중심으로 한 이집트인들의 생활 리듬은 오랜 세월 이어졌다. 나일강의 본류에서 뻗어 나간 지류와 운하는 마을 깊숙한 곳까지 물을 실어 날랐고, 사람들은 제방을 쌓고 저수지와 수로를 관리하며 끊임없이 물을 다루어야 했다. 나일강을 다스리는 일은 곧 농경지를 다스리는 일이었고, 물을 나누고 수로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사람과 노동을 조직하고 그 과정을 기록하고 통제하는 행정 체계가 필요했다.


이러한 수리와 농경의 관리가 이집트의 국가 형성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나일강을 중심으로 한 농업과 물의 관리가 초기 국가의 행정과 조직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일강은 이집트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강이면서 동시에 사람들을 조직하고 국가를 움직이게 하는 거대한 축이었던 셈이다.


나일강의 수위를 측정하던 나일로미터. 여러 곳에 있다./아스완 엘레판티네 섬


아프리카 동부의 호수 지대와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각각 발원한 두 물줄기, 백나일과 청나일은 수단의 하르툼에서 만나 하나의 강이 되어 이집트로 흘러든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강은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이집트의 긴 계곡을 지나고, 카이로에 이르면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지중해로 흘러든다. 나일강의 길이는 약 6,650킬로미터에 이른다.


나일강의 흐름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공간 감각에도 깊이 스며들었다. 강의 상류와 하류를 기준으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구분했고, 남쪽과 북쪽이라는 방향 역시 나일강의 흐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바라보면 이집트의 국토는 길고 우아한 줄기 끝에 풍성한 꽃 한 송이를 피워놓은 듯하다. 기다란 줄기는 나일강이 흐르는 나일 계곡이고, 카이로 북쪽에서 펼쳐지는 삼각형의 땅은 나일 델타다. 내 눈에는 그것이 마치 지중해를 향해 꽃잎을 활짝 펼친 연꽃 한 송이처럼 보인다.


고대부터 이집트인들은 바람과 물살만으로도 나일강에서 배를 운행할 수 있었다. 남쪽 상이집트의 아스완 쪽에서 북쪽 지중해 쪽으로 내려갈 때는 강의 흐름을 이용했고, 반대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는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돛에 받았다.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 이 두 가지 자연의 힘이 나일강을 남북을 잇는 가장 중요한 길로 만들었다. 사막 한가운데를 길게 흐르며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는 길. 고대 이집트의 군대와 상인과 여행자들도 이 물길을 따라 움직였다. 그것은 나일강이 지닌 숨길 수 없는 매혹이었고, 수천 년 뒤의 여행자에게도 나일강은 그 순환을 따라가는 길이 되었다.


나일강 크루즈


2003년 첫 여행 때만 해도 나는 나일강에 크루즈가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하긴 그때의 이집트는 내게 모든 것이 놀라움투성이었다.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이 중요한지조차 알지 못한 채 그저 눈앞에 펼쳐지는 것들을 받아들이기에도 벅찼다. 그래도 그 감동 때문이었을까, 이집트 관련 서적은 서재의 바카라장 영토를 넓혀갔다.

그리고 15년 뒤인 2018년, 나는 다시 이집트를 찾았다. 같은 나라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처음에는 그저 바라보았던 나일강이 이집트인의 시간을 이루어온 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고, 그 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시와 신전과 무덤들이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풍경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일강은 군대와 상인만의 길이 아니었다. 신들도 이 강 위를 오갔다. 고대 이집트의 축제에서는 신전의 신상을 배 모양의 성소에 모시고 강을 따라 운반하는 의례가 이루어졌다. 그 배는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신의 존재를 싣고 이동하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기자의 쿠푸 왕 피라미드 곁에서 발견된 거대한 선박은 이러한 의례용 배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배가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녔음을 떠올리게 했다.

신들을 모신 배들이 나일강을 오가며 펼쳤을 화려하고 떠들썩한 축제 행렬을, 나도 이 강 위에서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아스완에서 크루즈에 올랐다. 일정은 3박 4일. 아스완을 출발해 나일강의 흐름을 따라 북쪽으로 내려가 룩소르에서 배를 내리는 여행이었다.


나일강 크루즈는 언제 시작되었을까?


1869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된 직후, 영국의 여행업자 토머스 쿡(Thomas Cook)이 1870년경부터 나일강에 증기선을 도입하며 본격적인 관광상품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카이로에서 아스완까지 내려가거나 올라가는 긴 여정이었고, 19세기말에는 나일강 여행이 유럽과 미국의 부유층 관광객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여행이 되었다. 오늘날의 대형 크루즈선과는 다르지만, 룩소르에서 에스나, 에드푸와 콤옴보를 거쳐 아스완으로 이어지는 여행의 기본 골격 자체는 빅토리아 시대의 나일강 관광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이다.


문득 19세기말에서 20세기 전반기에 찍었을 법한 사진 속 몰상식한 관광객들이 스쳐 지나갔다. 기자의 대피라미드 위에 올라가 있거나, 카프라 피라미드의 장제전에서 오찬을 즐기던 사람들.


아스완


아스완은 강 건너편 황량한 산을 배경으로, 녹색의 작은 섬들 사이를 떠다니던 펠루카의 실루엣이 강하게 각인되는 아름다운 도시였다. 접안시설이 길게 늘어선 강변으로 크루즈선들이 정박하여 호기심 어린 손님들을 맞았다.

절벽 위에는 1899년에 문을 연 호텔 올드 카타락(Old Cataract Aswan)이 보이고, 배는 알록달록한 주택들이 정겨운, 크눔 신전이 있는 엘레판티네 섬을 지나 천천히 북쪽으로 움직였다. 아름다운 아스완을 빠져나오자, 초록의 농경지와 사막은 여전히 선명하게 맞붙어 있었고, 그 사이로 나일강이 흐르고 있었다. 갈라베야를 입은 어부들의 모습과 녹색 대지 너머로 보이는 사막 풍경까지, 도시를 벗어난 나일강의 물줄기는 고대의 모습을 상상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나일 크루즈선

에스나의 상인들


나일강을 따라 보낸 3박 4일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에스나 갑문에서의 일이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갑문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배가 갑문을 통과하려면 수위를 맞추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배의 4층에서 갑문 주변을 내려다보다가 뜻밖의 광경을 목격했다.


아래쪽에는 갈레베야를 입은 상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염색한 패브릭을 펼쳐 보였다. 대체로 큰 식탁보만 한 크기였다. 손가락을 움직여 가격을 흥정하고, “텐 달러!”를 외쳤다. 거래가 성사되면 패브릭을 비닐에 넣어 작게 말아 위로 던졌다. 크루즈선에서는 물건을 받아 돈을 넣은 비닐을 다시 아래로 던졌다. 배 안에도 누군가 거래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몇 차례 오가는 사이 거스름돈까지 전달되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펼쳐 보이고, 흥정하고, 던지고, 받고, 돈을 보내고, 다시 던졌다. 물건과 돈이 오가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갑문을 통과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눈을 깜박할 사이에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다. 정신없이 그 장면을 훔쳐보다가 정작 나는 아무것도 사지 못했다.

그곳에서 내가 본 것은 단순한 장사가 아니었다. 주어진 짧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 물건 하나를 팔기 위해 온몸의 감각을 집중하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속도와 질서가 있었다.

삶의 열정.

에스나 갑문에서 내 마음에 남은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에스나 갑문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크루즈선
에스나 상인들
에스나 상인들


수천 년 동안 이 강 위로 사람과 물자, 왕의 군대와 상인들, 그리고 신상을 모신 배가 오갔다. 나일강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단순한 물이 아니라 길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길 위에 있었다.

처음 이집트에 왔을 때 버스 창밖으로 보았던 검은 땅과 푸른 들판을, 15년 뒤에는 강 위에서 다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는 그 풍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이집트라는 나라를 만든 것은 거대한 피라미드만이 아니었다. 그 피라미드가 서 있을 수 있도록 수천 년 동안 흐르고 있었던 강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7년이 흐른 2025년 12월, 나는 세 번째로 이집트를 찾았다. 이번에는 나일강의 물길을 따라가는 대신, 그 강이 빚어낸 계곡과 사막의 경계에 자리한 사카라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