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감도는 열주 사이를 걸으며

이집트 - 사카라 -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by그루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아침 8시에 호텔 로비에서 약속한 가이드를 만났다. 그는 30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8대 2로 반듯하게 빗어 넘긴 머리하며, 무채색으로 통일된 옷매무새와 셔츠 위에 입은 단정한 카디건 차림은 뭔지 모르게 내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이집트인의 이미지와는 달라 보였다. 이름 또한 아랍식 이름이 아니었다. 순간 콥트교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기독교인이세요?”


라는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이 많으니까.

어쨌든 적당히 신경 쓴 옷차림은 상대방의 기분을 고양시키기도 하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를 보러 가는 길이다.


매연으로 가득한 카이로 시내를 벗어나 사카라(Saqqara)까지는 약 한 시간이 걸렸다. 사카라에 가까워지자 사막 위로 솟은 계단식 피라미드의 모습이 서서히 나타났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커 보였다. 멀리서도 여섯 단의 계단식 형태가 뚜렷하게 보인다.

티켓을 구입하고 사막길을 걸어 계단식 피라미드로 향했다. 길에는 각종 안내문이 세워져 있었다. 소지품 제한부터 카메라 촬영에 필요한 별도의 티켓까지, 이곳이 이미 오래된 유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관광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출입구의 파사드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다.

사막 한가운데 현대미술관처럼 보이는 계단식 피라미드 출입구의 파사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운데 출입구를 중심으로 좌우가 홈이 파인 직사각형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반복되는 직사각형의 돌출부와 안으로 파인 수직면이 하나의 거대한 기하학적 리듬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현대미술조차 따라올 수 없을 것 같은 리듬감이었다. 늘어났다 줄어들기를 반복하는 아코디언의 벨로우즈(Bellows)가 연상되기까지 했다.


시간에 따라 파사드에 떨어지는 빛과 그림자는 이 입체적인 벽에 또 다른 표정을 만들어낼 것이다.


석회암은 시간이 만들어낸 따뜻한 황금색과 연한 살구색,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서자 정교하게 다듬은 석회암 블록들이 빈틈없이 맞물려 있었다. 축조 당시의 성벽은 사막의 밝은 모래색이 무색할 만큼 밝게 빛났을 것이다. 햇빛을 받은 벽과 깊은 그림자의 대비는 현대미술에서나 볼 법한 강한 콘트라스트를 만들어냈을 것 같다.

입구 자체가 믿어지지 않는 건축적 충격이었다.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약 4,700년 전, 기원전 27세기경에 만들어졌다. 제3왕조 초기였다. 어떤 미니멀하고 추상적인 현대 건축물보다도 더 현대적으로 보이는 성벽 앞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현대미술은 때때로 새로운 것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이미지를 발굴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라고.


40개의 기둥이 있는 열주랑

입구를 지나자 긴 열주랑이 나타났다.


높이 약 6미터에 달하는 40여 개의 석조 기둥이 마치 식물이 땅에서 솟아난 것처럼 서 있었다. 좁은 통로에 도열한 기둥들은 파피루스 줄기와 같은 식물의 형태를 석재로 옮겨놓은 듯했다. 자세히 보니 완전히 독립된 기둥이라기보다 양쪽 배후의 벽에 연결된 붙임기둥이었다. 석조 건축에서 기둥이 발전해 가는 아주 이른 모습을 보여주는 건축이었다.


목조 건축의 섬세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 열주랑은 대한민국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을 떠올리게 했다.

시대와 장소는 다르고 서로 어떤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이 건축물들에서는 공통적으로 석재를 사용하면서도 그 이전의 목조건축이 남긴 형태와 구조적 기억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의 건축가들은 목재와 같은 익숙한 재료에서 돌이라는 영속적인 재료로 옮겨가면서도, 이전에 알고 있던 건축의 형태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서로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는 문명에서도 목재에서 석재로의 전환이 일어날 때 비슷한 건축적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조세르 계단식 피라미드 단지는 조세르 이전의 건축에서 익숙했던 목재와 진흙벽돌, 파피루스로 만들었던 세계를 돌로 옮겨놓은 가장 이른 거대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이곳에서 수천 년간 지속된 이집트의 규칙과 명료함, 그리고 영원이라는 개념이 건축의 모습으로 처음 거대한 규모로 드러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때는 제3왕조 초기였고, 이 시기는 이집트가 대규모 석조 건축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시기였다.


붉은 빛이 감도는 열주 사이를 걸으면서 문득 목조건축물에 칠했던 화려한 색이 이곳에도 칠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후대 이집트의 신전—아비도스의 세티 1세 신전, 덴데라의 하토르 신전, 룩소르의 메디네트 하부 신전 등—에는 채색의 흔적이 놀라울 만큼 많이 남아 있다.

카르나크 신전의 거대한 기둥들이 떠올랐다.

카르나크의 기둥들이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압도적인 숲이라면, 이곳의 기둥들은 부피감은 작고 더 절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아했다. 나는 오히려 카르나크 신전의 기둥들보다 이곳에서 더 고매한 아름다움을 느꼈다.


벽에 붙어있는 기둥

열주랑을 빠져나가자 가슴을 확 트이게 만드는 넓은 공터가 열렸다. 그리고 그 끝에 드디어 계단식 피라미드가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그 앞에서 긴 호흡을 내쉬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이 공터는 우연히 남겨진 빈터가 아니었다. 왕의 중요한 의례 가운데 하나인 헤브 세드(Heb-Sed)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남정원(Great South Court)이었다. 대남정원 주변에는 헤브 세드와 관련된 여러 건축물들이 도열해 있었다. 폐허를 생각하고 왔는데도 형태를 추측할 수 있을 만큼 온전히 서 있는 건축물이 꽤 남아 있었다.

피라미드 앞 넓은 공터가 헤브 세드 의례가 이루어졌던 대남정원(Great South Court)이다. 오른쪽 공터에 의례를 행했던 경계표가 남아있다.

헤브 세드는 왕의 통치권과 생명력, 왕권을 갱신하는 의례였다. 왕은 의례의 과정에서 정해진 경로를 달렸고, 그 달리기는 왕이 여전히 왕으로서의 힘을 지니고 있음을 상징했다.

조세르의 장례단지는 이 의례를 단순히 한 번의 축제로 끝내지 않았다. 헤브 세드와 관련된 공간과 건축물을 돌로 재현함으로써 왕의 갱신을 영원히 지속시키는 공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어쩌면 그의 카(ka)—이집트인들이 사람에게 깃들어 있다고 믿었던 생명력이자 영혼—는 지금도 이 넓은 정원을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의 오른쪽 그림은 조세르의 남쪽 무덤(South Tomb) 지하 회랑에서 발견된 부조다. 헤브 세드에서 달리는 조세르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살아 있는 왕의 몸은 사라졌지만, 왕권을 갱신하기 위해 달리던 순간만은 돌 속에 남아 있었다. 그의 달리기는 단순한 육체적 경주가 아니라 왕권의 갱신을 수행하는 의례적 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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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정원 옆에 있는 헤브 세드와 관련된 공간(왼쪽)/헤브 세드에서 달리는 조세르의 모습이 새겨진 부조(오른쪽)

남쪽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지만, 입구가 막혀 있어 내려갈 수는 없었다. 아래쪽으로 연결된 좁지만 매력적인 계단은 지상과 지하의 경계를 가르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눈앞의 계단은 오히려 나를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계단은 지그재그로 방향을 꺾으며 어둠 속 아래로 사라졌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데스의 영역으로 내려가는 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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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무덤으로 내려가는 계단(왼쪽)/계단식 피라미드의 지하통로(오른쪽)

대남정원을 걷다가 결국 계단식 피라미드 아래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났다.

출입구는 지나치게 잘 정돈되어 있어 근래에 만들어진 관람 시설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이야기가 달라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좁은 통로가 나타났다. 어두운 통로를 벗어나자 돌기둥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년 전의 지하인데도 내가 들어간 회랑은 사람이 지나가기에 꼭 맞는 높이였다. 은은한 조명의 빛이 닿는 곳마다 오래된 복도가 이어졌다. 누군가가 걸어갈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길이었다.


군데군데 결이 그대로 남은 듯한 로댕의 조각 작품처럼, 약간은 거친 벽과 천장, 덜 다듬은 듯한 둥근 돌기둥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요한 지하세계를 안내하고 있었다. 죽은 왕 조세르와 그의 카를 위해 마련된 길이 아닌가. 그 분위기는 완벽한 대칭과 규칙으로 대변되는 이집트의 이미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죽은 자의 세계에서 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으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안내문에 따르면, 내가 걷고 있던 통로는 조세르가 피라미드를 세운 시대의 것이 아니었다. 약 2천 년 뒤인 제26왕조 사이스 시대(기원전 664~525년)에 만들어진 통로였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보다 아득히 앞선 시대의 왕릉을 다시 열어 내부를 살피고, 일부를 복원하려 했다. 그들에게 조세르의 피라미드는 단지 오래된 돌무덤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는 기념물이었던 것이다.

상기된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50여 미터쯤 갔을까? 통로의 끝에는 왕의 매장실로 이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는 약 28미터 깊이의 수직 갱도가 있었다.


임호텝


지상으로 올라와 다시 눈이 부신 햇빛 아래 서자, 가이드가 계단식 피라미드를 올려다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카이로 남서쪽 사카라에 위치한 이 피라미드는 이집트 최초의 피라미드이며, 고대 이집트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대규모 석조 건축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건축물이 아니었다. 조세르 이전의 왕조에서는 이미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행정과 경제 체계가 발전하고 있었고, 장례 건축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해왔다. 조세르는 그 축적된 기술과 행정력을 거대한 석조 건축으로 시각화했다.

왕권이 동원할 수 있는 인적·물적 자원이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조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건축이었다.

이 모든 걸 실행시킨 이는 누구였을까. 궁금해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가이드가 이름 하나를 꺼냈다. 임호텝(Imhotep).

그의 정확한 생몰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했다. 다만 그가 조세르 시대, 기원전 27세기경에 활동한 고위 관료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세르 동상의 받침대에 그의 이름과 직함이 새겨진 동시대의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동상 자체는 사라졌지만, 받침대에 새겨진 명문이 임호텝이라는 인물을 조세르의 시대에 실제로 존재했던 고위 인물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주었다.

이집트 아스완 근처 세헬 섬에 있는 기근 비석/ en.wikipedia

조세르와 임호텝을 생각하다 보면 아스완에 남아 있는 한 비문이 떠오른다. 세헬 섬의 바위에 새겨진 이른바 ‘기근의 비(Famine Stela)’에는 조세르와 그의 신하 임호텝, 그리고 나일강 상류의 신 크눔이 등장한다.

비문에 따르면 조세르 통치 18년, 나일강의 범람이 7년 동안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기근이 닥치자, 조세르는 임호텝에게 그 원인을 알아보게 한다. 임호텝은 나일의 범람과 관련된 신 크눔(Khnum)을 찾아 엘레판티네로 향하고, 크눔에게 제물을 바친다. 이후 조세르는 크눔에게 토지와 봉헌물을 바치고 신전을 돌보도록 명령한다.

하지만 이 비문은 조세르 시대의 기록이 아니라 훨씬 후대인 프톨레마이오스 시대에 새겨졌다. 그럼에도 이 비문은 흥미롭다. 수천 년 뒤의 이집트인들이 조세르와 임호텝을 나일강의 범람을 관장하는 신 크눔과 연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후대의 전승은 임호텝을 위대한 현자이자 의술과 연결된 인물로 기억했고, 훗날에는 신격화하기까지 했다.

정사각형의 마스타바에서부터 발전한 계단식 피라미드로의 단계/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안내문

계단식 피라미드가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석재를 이용하여 지하 통로로 연결되는 입구를 갖춘, 정사각형에 가까운 마스타바(위가 평평하고 낮은 직사각형 무덤)를 만들었다. 완성된 마스타바는 어마어마하게 큰 마스타바로 확장되더니 결국 몇 단계 후에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거대한 원래 높이 62미터 높이의 기념물로 성장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저 여섯 단의 형태 하나하나가, 왕실의 기존 장례 건축이었던 마스타바에서 출발해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발전해온 시간의 흔적인 셈이었다.


그 아래에는 약 28미터 깊이의 중앙 매장 갱도와 수많은 방과 회랑이 복잡하게 펼쳐져 있다. 지상에는 왕의 의례를 위한 공간이 있고, 지하에는 갈대 매트의 패턴을 모방한 청록색 파이앙스로 화려하게 장식한 왕의 사후 존재를 위한 세계가 있다. 이 방은 왕의 영원한 거처를 상징하며 아마도 실제 왕이 살았던 왕궁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거대한 석회암 성벽이 둘러싸고 있다.


‘성스러운 몸’이라는 뜻의 네체르케트(널리 알려진 조세르란 이름은 후대에 불린 이름이다) 왕의 계단식 피라미드와 부속된 장례단지는 단순한 최초의 석조건축물이 아니었다. 석회암 성벽은 매우 아름답고 견고했으며, 조세르의 남쪽 무덤 벽의 프리즈에 장식된 고개를 쳐든 코브라는 왕을 보호하고 있었고, 헤브 세드는 영원히 살아 있는 왕권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조세르에게 죽음은 왕의 세계가 끝나는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즉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는 강력한 왕권을 천명한, 시대의 획을 긋는 역사적 구조물이었다.


계단식 피라미드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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