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그리는 52일'
최근 나를 울게 하거나 웃게 한 순간은?
최근 한 달 안에서 감정이 크게 움직였던 순간을 하나 골라보세요. 그 상황을 장면처럼 자세히 묘사하고, 지금 다시 떠올렸을 때 드는 생각을 마지막에 적어보세요.
최근 내 감정을 가장 크게 움직였던 순간은 추석이었다.
올해 설날, 고향에 내려가 제사를 지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정말 계속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사고로 어깨를 다쳐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든 어머니는 한 손으로 간신히 음식을 만들고 계셨다.
아버지는 가부장적인 할아버지 밑에서 배운 대로 집안일에 손을 보태지 않으셨다.
제사 음식을 미리 준비해 두느라 어머니는 냉장고를 세 대나 사용하고 계셨다.
심지어 자식이 고생할까 봐 미리 음식들을 손질하고 준비하시느라 이미 어머니는 지쳐버린 상태셨다.
부엌에서는 전을 부치고 고기를 익히느라 쉴 틈이 없었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한 음식으로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제사상을 차렸지만, 정작 제사는 새벽에 10분 남짓 절을 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제는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도 대부분 돌아가셨고, 친척들도 나이가 들거나 서울에 살아 쉽게 오가기 어려웠다. 찾아오는 손님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할 이유는 점점 줄어들었지만, 명절 풍경은 예전 그대로였다.
제사가 끝나면 곧바로 뒷정리가 시작됐다. 음식을 용기에 담고 그릇을 치우는 사이 사소한 말다툼까지 오갔다. 쌓여 있던 서운함이 드러나면서 부모님은 오히려 서로 서먹해지고 말았다.
나 역시 편하지 않았다. 어렵게 지방까지 내려와 아내와 함께 설음식을 준비했지만 제대로 쉬지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다. 함께 일한 아내도 몸살이 날 정도로 지쳐 있었다.
가족을 만나러 왔는데, 정작 가족과 함께할 시간은 없었다.
그날 나는 이 익숙한 풍경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점심 무렵 누나들이 도착하면 이야기를 꺼내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이미 10년도 더 전부터 명절에 제사 대신 여행을 떠나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지방에 계신 부모님은 오랫동안 이어 온 관습을 쉽게 바꾸기 어려우실 것 같았다. 반대에 부딪힐까 걱정도 됐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막내아들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아들의 의견을 따르는 게 맞다는 것이 가족들의 다수 의견이었다. 심지어 아버지까지 동의하셨다.
기뻤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제 모든 바카라임이 내게 돌아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무게였다.
나는 결국 선언하듯 말했다.
“이번 가을부터 방법을 찾아볼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준비는 생각보다 일찍 시작됐다. 추석을 다섯 달 앞두고 숙소를 예약했고, 누나들과 매달 여행 비용을 모았다. 틈틈이 여행 계획도 세웠다. 물론 기차 예매에 실패해 자동차를 빌려 지방까지 내려갈 줄은 몰랐고, 감기몸살에 시달릴 줄도 몰랐다.
그래도 이번에는 정말 달라질 예정이었다.
추석이 다가왔지만 부엌은 분주해지지 않았다.
음식을 만들고 제사상을 차리는 대신 여행 가방을 챙겼다.
준비한 음식을 나르는 대신 차에 짐을 실었다.
늘 하던 일을 반복하는 대신 가족들과 함께 여행지로 향했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랐다.
여행지에 도착해 맛있는 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쉬었다.
평소 같으면 식사를 마치자마자 설거지와 다음 일을 걱정했겠지만, 이번에는 서둘러 일어날 이유가 없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여유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편하게 쉬었다.
다음 날 추석 당일에는 큰누나와 작은누나네 가족도 숙소로 찾아왔다.
가족들이 하나둘 도착하자 조용하던 숙소에 웃음소리가 채워졌다. 누군가는 소파에 앉아 쉬고, 누군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비큐를 준비할 때는 고소한 냄새가 퍼졌고, 고기가 익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함께 상을 차리고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설날에도 우리는 음식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때는 정해진 일을 해내기 위해 분주했다면, 이번에는 함께 먹고 즐기기 위해 움직였다. 누군가는 고기를 굽고, 누군가는 상을 차리고, 누군가는 배드민턴을 쳤다. 또 누군가는 편하게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꼭 캠핑장에 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부모님도 그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함께 계셨다는 사실이다. 어머니는 주방을 떠나지 못할 만큼 음식을 만들 필요가 없었고, 아버지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부모님은 가족들과 함께 먹고 쉬며 시간을 보내셨다.
예전에는 가족들이 한집에 모여 있어도 각자 해야 할 일에 매여 있었다. 이번에는 해야 할 일이 줄어든 만큼 서로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생겼다.
모두가 돌아간 저녁, 어머니는 그제야 이번 추석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감하신 듯했다.
늘 명절이면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리고 치우는 것이 당연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는데, 우리는 그동안 왜 하지 못했을까?
설날에는 풍성한 제사상을 차리고도 마음이 무거웠다. 추석에는 거창한 상 하나 차리지 않았지만 가족들의 웃음과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야 뒷정리가 시작되던 명절이, 이번에는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되었다.
결국 달라진 건 음식도, 가족의 숫자도 아니었다. 명절에 반드시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을 내려놓았을 뿐이었다.
물론 여행이 마냥 편안했던 건 아니다. 감기몸살이 심했고, 서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거의 8시간을 운전해야 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가족들이 여기저기 모여 쉬던 모습, 바비큐를 구워 먹으며 웃고 떠들던 장면, 부모님과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이 자꾸 떠올랐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올해 추석은 단순히 여행을 다녀온 날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당연하다고 여겨 온 일을 바꾸고, 우리 가족에게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한 시간이었다.
가족을 위해 누군가가 참고 견뎌야만 유지되는 명절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명절도 가능했다.
이번일로 스스로에게도 칭찬을 해 주고 싶다.
해야 한다고 배워 온 일을 무조건 반복하는 대신,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머무르지 않고 일단 이야기를 꺼내 방법을 찾아보았다는 것.
익숙한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면 이번 추석의 즐거움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가장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면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보다 가족들이 여기저기 모여 편안하게 쉬던 모습이 먼저 생각난다. 고기를 구우며 웃고, 별다른 목적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던 모습 말이다.
가족이 함께한다는 건 꼭 무언가를 준비하고 치러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함께할 수 있다.
이번 추석에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조금 늦게, 하지만 아주 기쁘게 깨달았다.
이제 내년 설날이 다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사 준비가 아닌 즐거운 여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벌써부터 명절이 기다려지네요.
여러분은 최근에 웃거나 울 일이 있으셨나요? 말하고 나면 시원할 이야기들을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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