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그리는 52일'
요즘 내가 자주 느끼는 감정 세 가지는?
기쁨, 슬픔처럼 큰 단어 대신 조금 더 구체적인 감정 단어를 찾아보려 노력해 보세요. 각 감정이 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 찾아오는지 한 줄씩 덧붙이면 자기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첫 번째 감정은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리’이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하나를 겨우 넘기고 나면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돌아볼 여유도 없이 밀려오는 일들을 하나씩 처리하다 보면,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막막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주문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리.’
물론 이 말을 몇 번 반복한다고 해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거나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놓인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내가 해야 할 일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다 보면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는다. 당장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의 힘든 순간도 언젠가는 지나갈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게 된다.
어쩌면 이 말은 상황을 바꾸기 위한 주문이 아니라, 상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나를 붙잡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감정은 ‘아니, 이게 맞아?’이다.
요즘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자주 눈에 들어온다. 상식적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더 이상 상식적이지 않고, 당연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를 마주할 때마다 한 번 더 의심하고, 혹시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피게 된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일도 많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도 있다.
예전 같으면 별다른 고민 없이 넘겼을 일에도 이제는 마음을 놓기가 어렵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아 한발 물러서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조심스럽게 행동한다. 그렇게 매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다 보니 별일이 없어도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다.
‘아니, 이게 맞아?’
이 말은 세상을 향한 의문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며 살아가는 내 마음의 반응이기도 하다. 무엇이 맞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세상에서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쉽게 휩쓸리지 않으려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감정은 ‘슬롯성 몰빵’이다.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가거나 친척, 지인들을 만날 때면 평소보다 조금 더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한다. 특별히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그렇다고 내 사정을 꺼내놓고 위로나 동정을 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누군가에게 나의 힘든 상황을 설명하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내게 쏠리는 것도 어쩐지 불편하다. 내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 자체가 피곤하기도 하다.
그래서 적당히 웃고, 적당히 안부를 묻고, 적당한 이야기를 나눈다. 딱히 불편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서로에게 무난한 시간을 만들어주는 것. 어쩌면 그것도 슬롯생활에 필요한 기술일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특히 가끔 만나거나 서로에게 큰 관심이 없는 느슨한 관계에서는 진심을 낱낱이 설명하기보다 서로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예의를 지키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나는 그런 행동을 어느 정도의 가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슬롯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고 여긴다. 문제는 그 역할을 오래 해내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밝게 웃고, 상대의 이야기에 반응하고, 분위기를 살피는 동안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사람들과 무사히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오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예전에는 그럭저럭 해낼 수 있었던 일인데, 이제는 그마저도 방전이 빠르다.
슬롯성을 발휘해야 하는 순간은 여전히 많지만, 그럴 때마다 내 안에 남아 있는 에너지가 얼마나 되는지부터 살피게 된다.
돌아보면 요즘 내 마음에는 세 가지 감정이 함께 살고 있다.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 앞에서는 ‘이 모든 것도 다 지나가리’라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세상을 보며 ‘아니, 이게 맞아?’라고 되묻는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은 에너지를 끌어모아 슬롯성을 발휘한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저런 감정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배우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세상의 모든 일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으며, 때로는 내 마음과 다른 표정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일까지도.
이제는 모든 것을 잘 해내려 애쓰기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해내고 싶다.
세상에 대한 경계를 조금은 늦추고, 사람들 사이에서 애써 웃은 날에는 혼자 있는 시간도 충분히 누리고 싶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는 말을 믿으면서, 그 시간을 버텨내는 나 자신까지 너무 몰아붙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감정들을 느끼고 계신가요? 그 감정들을 댓글로 공유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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